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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부자였던 남자는 노비 [만복야담]
장사와 무역으로 양반보다 더 많은 재산을 모은 천민 출신 거상들. 돈은 있지만 신분은 살 수 없었던 시대, 그들이 선택한 놀라운 우회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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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살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신분이었습니다. 양반은 가난해도 양반이었고, 노비는 부자가 되어도 노비였습니다. 그런데 이 불가능해 보이는 벽을 뚫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금 한 줌으로 시작해 팔도의 어물전을 손에 쥔 남자, 중국 상인도 혀를 내두른 조선 최고의 무역왕, 양반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족보를 산 놀라운 전략가까지. 이들은 조선이 만들어놓은 신분의 사다리를 돈으로, 머리로, 그리고 끈기로 올라간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조선에서 가장 부자였던 천민 출신 거상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다던 신분을, 이들은 어떻게 뒤집었을까요.
※ 1: 노비 출신 만득이 아버지의 소금 짐을 지고 장터에 서며
영조 치세 초, 충청도 서산 갯벌 근처에 소금을 굽는 염전이 하나 있었습니다. 갯벌 위에 갈대를 엮어 만든 움막 대여섯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그 앞으로 소금 가마가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가마 아래서 불을 때면 바닷물이 증발하면서 하얀 소금 결정이 남았는데, 그 소금을 긁어모아 가마니에 담는 것이 염간들의 일이었습니다. 이 염전은 서산 관아 소속이었고, 여기서 일하는 염간은 모두 관노비였습니다. 관노비라 함은 나라에 소속된 노비를 말하는 것인데, 사노비보다는 형편이 조금 나았지만 어디까지나 천민이었습니다. 아무리 일을 잘해도 벼슬을 할 수 없었고, 양반이 지나가면 길을 비켜야 했으며, 이름 앞에 늘 종놈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습니다. 사람이되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그것이 조선의 노비였습니다.
이 염전에서 소금을 굽던 사내 중에 박돌쇠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나이 마흔이 넘도록 염전에서 허리가 휠 만큼 일했지만, 가진 것이라곤 갈대로 엮은 움막 한 채와 소금 가마 하나, 그리고 등이 벌겋게 헐도록 짐을 나르는 데 쓰던 낡은 지게 하나뿐이었습니다. 손톱 밑에는 소금기가 빠지지 않아 늘 하얗게 갈라져 있었고, 소금 가마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얼굴은 검붉게 그을려 실제 나이보다 열 살은 더 들어 보였습니다. 그런 돌쇠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만득이었습니다. 만득이라는 이름은 만 가지를 얻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아버지 돌쇠가 평생 가난하게 살았으니, 아들만은 많은 것을 얻고 살라는 간절한 바람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만득은 열두 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소금 짐을 졌습니다. 서산 염전에서 구운 소금을 지게에 지고, 해미장, 홍주장, 멀리는 공주장까지 사흘 걸어 팔러 다녔습니다. 열두 살 아이의 등에 얹히는 소금 짐은 삼십 근이 넘었습니다. 지게를 지면 어깨뼈가 욱신거렸고, 짚신이 닳아 맨발로 자갈길을 걸어야 하는 날도 많았습니다. 한겨울에 맨발로 얼어붙은 땅을 걸으면 발가락이 감각을 잃었고, 한여름에 소금 짐을 지면 등 위로 흐르는 땀이 갈라진 피부 틈에 스며들어 쓰라렸습니다.
그러나 만득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장터에 가면 세상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장터는 만득에게 서당이었고, 좌판은 교과서였습니다. 만득은 눈으로 배웠습니다. 어떤 물건이 빨리 팔리고 어떤 물건이 좌판 위에서 하루 종일 묵히는지, 어떤 장사치가 손님을 불러모으고 어떤 장사치가 파리만 날리는지를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특히 만득의 눈길을 끈 것은 장사를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의 차이였습니다. 같은 물건을 팔아도 어떤 장사치는 값을 후하게 받았고, 어떤 장사치는 밑지고 팔았습니다. 그 차이는 물건의 품질이 아니라, 물건을 내놓는 시점과 장소에 있었습니다.
만득이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소금의 가치가 장소에 따라 극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산 염전 바로 앞 장터에서 소금 한 가마니는 쌀 한 말 값이었습니다. 소금이 지천이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소금을 소금이 귀한 내륙 산골, 금산이나 무주까지 가져가면 쌀 세 말에서 네 말 값으로 뛰었습니다. 같은 물건인데 놓이는 장소만 바뀌면 값이 세네 배가 되는 것입니다. 열두 살 아이는 이것을 본능적으로 이해했습니다. 물건의 가치는 물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이 놓인 장소와 그 물건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결정한다는 것을. 이것은 만득이 평생 장사의 제일 원칙으로 삼게 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열다섯이 되던 해, 만득은 아버지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아버지, 우리가 소금을 가까운 장터에 내다 파는 것은 남는 것이 너무 적습니다. 내륙 깊숙한 곳까지 직접 가지고 가면 어떻겠습니까. 공주를 넘어 금산까지, 금산을 넘어 무주까지 가면, 소금 값이 서너 배는 될 것입니다. 돌쇠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 먼 길을 누가 지고 가느냐. 산적도 많고, 관의 검문도 있고, 길에서 비라도 맞으면 소금이 녹아내린다. 위험한 짓이다. 만득이 대답했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아버지는 여기서 소금을 굽고 계시면 됩니다.
만득은 정말로 갔습니다. 소금 서른 근을 지게에 지고, 서산에서 금산까지 닷새 길을 혼자 걸었습니다. 두 번째 날 밤, 산길에서 폭우를 만나 소금이 젖을 뻔했는데, 만득은 지게를 내려놓고 자신의 윗옷을 벗어 소금 가마니를 감싸 빗물을 막았습니다. 자신은 비에 젖어 온몸이 떨렸지만, 소금만은 지켰습니다. 셋째 날에는 도적 두 명을 만났습니다. 도적들은 만득의 짚신을 빼앗고 가진 엽전 몇 닢을 털어갔지만, 소금 짐은 무거워서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만득은 맨발로 자갈밭을 걸으며 속으로 웃었습니다. 저 도적놈들은 이 소금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다. 이 소금이 금산에 도착하면 저들이 빼앗아 간 엽전의 수십 배 값이 되는 것을.
금산 장터에 도착한 만득은 소금을 내놓았고, 소금이 귀한 산골 장터에서 서산 값의 네 배에 팔렸습니다. 만득은 그 돈을 움켜쥐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이 돈을 그대로 가지고 돌아가면, 닷새 걸어온 품삯만 남는 것이다. 만득의 눈이 금산 장터를 훑었습니다. 금산의 특산물인 인삼 뿌리가 좌판 위에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인삼은 금산에서는 흔해 빠진 물건이었지만, 서해안 장터에서는 귀한 약재로 높은 값에 팔리는 것을 만득은 장터를 다니며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만득은 소금을 판 돈으로 인삼 뿌리를 사들였고, 인삼을 지게에 지고 다시 서산으로 걸어 돌아왔습니다. 인삼은 금산 값의 세 배에 팔렸습니다.
소금을 지고 가서 비싸게 팔고, 그 돈으로 현지 특산물을 사서 돌아와 다시 비싸게 파는 것. 한 번 왕복에 양쪽에서 이익을 남기는 것. 이것이 만득이 열다섯에 터득한 왕복 거래의 원리였습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닷새 길을 삼십 근 짐을 지고 걸어야 했고, 도적과 날씨와 관의 검문과 싸워야 했으며, 무엇보다 천민인 자신이 각 고을의 장터에서 좌판을 벌일 권리조차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득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열다섯부터 스물까지, 소금과 인삼을 오가며 부지런히 돈을 모았습니다. 이십 대 초반에 소 한 마리를 사서 지게 대신 소 등에 짐을 실었고, 이십 대 중반에는 소가 세 마리가 되었습니다. 스물다섯이 되었을 때, 만득의 밑에서 짐을 나르는 사람이 다섯 명이나 되었습니다. 노비의 아들이, 사람을 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직은 보잘것없는 시작이었지만, 만득의 눈은 이미 소금과 인삼을 넘어서 더 큰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 2: 만득이 흉년을 기회로 삼아 곡물 중개에 뛰어들고
만득이 스물일곱 되던 해, 조선 팔도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봄부터 비가 오지 않아 논바닥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졌고, 여름에는 남쪽에서 올라온 메뚜기 떼가 밭을 덮쳐 콩이며 조며 잎사귀째 갉아먹었습니다. 가을이 되어도 거둘 곡식이 없었고, 쌀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장터마다 곡물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고, 없는 사람은 나무껍질을 벗겨 죽을 끓여 먹어야 했습니다. 흉년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만득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습니다.
만득이 남들과 달랐던 것은 귀가 밝았다는 것입니다. 만득은 장터를 돌아다니며 늙은 농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양반들은 농부의 말을 하찮게 여겼지만, 만득은 수십 년 땅을 일군 농부의 경험이 어떤 책보다 정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흉년이 들기 전 해 가을, 공주 장터에서 만난 칠십 넘은 늙은 농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올 가을에 메뚜기가 유난히 많다. 내가 평생 농사를 지어왔지만, 가을에 메뚜기가 이렇게 들끓는 해 다음에는 반드시 메뚜기 떼가 온다. 세 번 겪었으니 틀림없다.
만득은 이 말을 메모하듯 가슴에 새겼습니다. 집에 돌아온 만득은 고민했습니다. 늙은 농부의 말이 맞다면 내년에 흉년이 올 것이다. 흉년이 오면 곡물 값이 폭등한다. 지금 곡물을 미리 사두면 어떨까.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도박이었습니다. 늙은 농부의 경험담 하나에 전 재산을 거는 것이니까요. 만득은 석 달을 더 관찰했습니다. 겨울 동안 서산 들판의 풀숲을 뒤져보니, 정말로 메뚜기 알이 땅속에 빽빽하게 박혀 있었습니다. 만득은 결심했습니다.
겨울 내내 만득은 자신이 모은 돈 전부를 털어,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의 곡물을 미리 사들였습니다. 쌀, 보리, 콩, 좁쌀 가리지 않고 사들였습니다. 평시 가격이었으니 싸게 살 수 있었고, 만득은 서산 근처에 빌린 창고 세 곳을 곡물로 가득 채웠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만득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소금장사와 인삼 장사로 십 년 동안 어렵사리 모은 돈을 곡물에 다 쏟아붓다니, 흉년이 들지 않으면 그 곡물을 어찌할 셈이냐고 했습니다. 아버지 돌쇠마저 아들의 판단을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봄이 오자, 만득의 예측은 적중했습니다. 전라도 남원에서 시작된 메뚜기 떼가 북으로, 북으로 올라와 충청도 전역을 덮쳤습니다. 하늘이 까맣게 될 만큼 메뚜기가 날아들었고, 메뚜기 떼가 지나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 남지 않았습니다. 논밭이 초토화되었고, 쌀값이 평시의 다섯 배까지 뛰었습니다. 서산 장터에서 쌀 한 가마니에 엽전 열 냥 하던 것이 쉰 냥까지 치솟은 것입니다. 만득의 창고에는 수백 가마니의 곡물이 쌓여 있었습니다.
여기서 만득이 보통의 장사꾼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이 드러납니다. 보통 장사꾼이라면 쌀값이 가장 높을 때 전량을 팔아 최대 이익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득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만득은 곡물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삼분의 일은 시세보다 약간 낮은 가격에 시장에 풀었습니다.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으로 내놓은 것입니다. 두 번째 삼분의 일은 서산 관아에 헐값으로 넘겼습니다. 관아가 백성 구휼에 쓸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삼분의 일은 아예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굶주리는 백성들을 모아놓고 솥을 걸어 죽을 끓여 나누어주었습니다. 서산 장터 앞에서 만득이 직접 죽을 퍼주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또다시 만득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최고가에 팔면 원래 투자금의 다섯 배를 남길 수 있는데, 삼분의 일을 그냥 퍼주다니, 저 사내가 제정신이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만득의 계산은 달랐습니다. 만득은 장터에서 배운 사람이었고, 장터에서는 눈앞의 이익보다 내일의 거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만득이 이 한 번의 거래에서 거둔 진짜 수확은 돈이 아니라 세 가지 무형의 자산이었습니다.
첫째,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판 곡물은 만득에게 상인으로서의 신용을 만들어주었습니다. 흉년에 폭리를 취하지 않은 장사꾼이라는 평판은, 엽전으로 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이후 만득과 거래하겠다는 상인들이 줄을 섰습니다. 사람들은 만득에게 물건을 맡기면 떼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만득이 파는 물건이면 믿고 살 수 있다는 신뢰가 형성된 것입니다.
둘째, 관아에 헐값으로 넘긴 곡물은 서산 현감의 눈에 들게 했습니다. 현감은 만득을 불러 치하했고, 이후 만득이 서산과 주변 고을 장터에서 좌판을 벌이는 것을 묵인해주었습니다. 원래 천민은 장터에서 좌판을 벌이려면 관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그 허가를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그런데 만득은 곡물 한 번으로 관의 비호를 얻어낸 것입니다.
셋째,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죽을 나누어준 것은 만득의 이름을 서산뿐 아니라 홍주, 태안, 보령까지 퍼뜨렸습니다. 사람들은 만득을 의로운 장사치, 살아 있는 부처라 불렀고, 만득이 가는 곳마다 문을 열고 환대했습니다. 장사꾼에게 이보다 좋은 영업 수단이 어디 있겠습니까.
돈과 신용과 이름, 세 가지를 동시에 거둔 것입니다. 보통 장사꾼은 돈만을 좇지만, 만득은 신용과 이름이 결국 더 큰 돈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스물일곱의 나이에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만득의 두 번째 장사 원칙이 됩니다. 당장의 이익보다 오래갈 신용을 먼저 쌓아라. 한 번 쌓은 신용은 열 번의 거래보다 값지다.
흉년이 지나고 풍년이 돌아왔을 때, 만득은 이미 서산과 홍주 일대에서 가장 큰 곡물 중개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소금 짐을 지고 산길을 걷던 소년이, 어느새 곡물 수백 가마니를 거래하는 상인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노비의 핏줄이 양반 못지않은 재산을 쥐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만득의 눈은 이미 곡물을 넘어 더 큰 것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서해안으로 밀려드는 은빛 물결, 조기와 민어와 새우와 굴비. 어물이었습니다.
※ 3: 만득이 서해안 어물 유통을 장악하며 한양 어물전의 최대 공급자
만득이 서른이 되던 해, 서해안 어장이 대풍이었습니다. 법성포에서 잡히는 조기가 배 위에서 썩어갈 만큼 많았고, 태안 앞바다의 새우는 그물을 내리기만 하면 터져나올 지경이었으며, 위도 앞바다의 민어는 뱃전을 두드리면 놀라 뛰어오를 만큼 떼를 지어 몰려다녔습니다. 어부들은 풍어를 반겼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잡아올린 생선을 팔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선이라는 것이 하루 이틀이면 상하는 물건이니, 아무리 많이 잡아봐야 가까운 포구 장터에서 헐값에 넘기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새우젓은 항아리가 모자라 남는 새우를 땅에 묻어야 했고, 조기는 배 위에서 은빛이 검게 변해가는 것을 어부들이 눈 뜨고 지켜봐야 했습니다. 반면 한양 장안의 양반가 안주인들은 신선한 어물을 구하지 못해 안달이었습니다. 공급은 바다에서 넘쳐나는데, 그것이 수요가 있는 한양까지 닿지 못하는 것. 물건의 문제가 아니라 유통의 문제였습니다.
만득은 이 문제를 정확히 짚어냈습니다. 만득의 머릿속에는 열다섯 살 때 깨달은 첫 번째 원칙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물건의 가치는 물건이 아니라 장소가 결정한다. 서해안 포구에서 썩어가는 조기 한 두름이, 한양 어물전 좌판 위에 올라가기만 하면 열 배의 값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상하기 전에 한양까지 보내는 방법뿐이다. 이 문제만 풀면, 서해안의 넘치는 어물이 전부 돈으로 바뀌는 것이다.
만득은 두 가지 해결책을 찾아냈습니다. 첫째는 뱃길이었습니다. 법성포에서 한양까지 육로로 가면 닷새 이상 걸리는 길이, 서해안을 따라 뱃길로 올라가면 이틀이면 닿았습니다. 이틀이면 소금에 절인 생선이 상하기 전에 한양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만득은 곡물 장사로 벌어놓은 돈의 절반을 털어, 운반선 두 척을 사들였습니다. 노비 출신이 배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 시대에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배를 사려면 관의 허가가 필요했고, 천민에게 허가가 내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득의 이름은 이미 서산 현감의 귀에까지 닿아 있었고, 흉년 때 곡물을 풀어 백성을 구한 공이 관의 문을 열어준 것입니다. 신용이라는 무형의 자산이 배 두 척이라는 유형의 자산으로 바뀐 순간이었습니다.
둘째는 소금이었습니다. 만득의 출발점이자 뿌리였던 소금이, 어물 사업에서 다시 한번 빛을 발했습니다. 생선을 오래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금에 절이는 것인데, 만득은 아버지 돌쇠에게서 물려받은 소금 지식을 바탕으로 어종별 최적의 절임법을 개발했습니다. 조기는 소금을 듬뿍 써서 강하게 절여야 살이 단단해지면서도 비린내가 줄었고, 민어는 소금을 적게 써서 살짝만 절여야 부드러운 맛이 살았습니다. 새우젓은 소금의 양보다 절이는 시간이 중요했는데, 보름 이상 삭혀야 감칠맛이 깊어졌습니다. 이 기술은 만득만의 비법이었고, 이 비법 하나가 만득의 어물이 한양에서 최고 가격을 받는 비결이 되었습니다. 같은 조기를 사도 만득이 절인 굴비는 살이 꼬들꼬들하면서도 짜지 않아, 양반가 안주인들이 만득의 굴비만 찾게 된 것입니다.
만득은 서해안의 주요 포구마다 매입처를 세웠습니다. 법성포, 위도, 군산, 태안, 서산 앞바다, 이 다섯 곳에 만득의 사람을 상주시켜 어부들이 잡아오는 생선을 현장에서 바로 사들이게 했습니다. 사들인 어물은 즉시 소금에 절여졌고, 운반선에 실려 한양의 마포나루로 올라갔습니다. 마포나루에서 내린 어물은 만득이 한양에 마련한 창고에 보관되었다가, 종로와 남대문 어물전에 공급되었습니다. 포구에서 어물전까지, 잡는 사람부터 먹는 사람까지 모든 과정을 만득이 장악한 것입니다. 중간 상인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기에, 이익은 고스란히 만득에게 돌아왔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한양 어물전 물량의 절반 이상이 만득의 손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만득의 굴비와 새우젓은 맛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하여, 양반가에서는 만득표 어물이 아니면 상을 차리지 않겠다는 안주인까지 생겨났습니다. 궁궐 안에까지 만득의 어물이 들어갔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돈이 물밀듯이 밀려들었습니다. 서른다섯이 되었을 때, 만득은 서산에 기와집 세 채를 짓고, 한양에 별채를 마련하고, 운반선 다섯 척을 가진 조선 서해안 최대의 어물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노비 한 명 없이 소금 짐 하나로 시작한 장사가, 이제는 오십 명이 넘는 사람을 먹여 살리는 사업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쌓일수록, 만득의 마음에는 돈으로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한양 어물전에서 큰 거래를 마치고 나오는 길, 양반 차림의 한 상인이 만득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자네 장사 수완은 팔도에 비할 자가 없네만, 아무리 돈을 벌어도 자네는 천민이지 않은가. 이 어물전에서 자네 돈으로 먹고사는 양반이 수십인데, 그 양반들 앞에서 자네는 여전히 고개를 숙여야 하지 않나. 그 말이 만득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만득이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관청에 가면 마당에 무릎을 꿇어야 했고, 양반을 만나면 고개를 숙여야 했습니다. 만득의 돈으로 밥을 먹는 양반 상인들조차 만득에게 반말을 했고, 만득은 그 반말을 듣고 있어야 했습니다.
소금장수의 아들이 어물전의 왕이 되었지만, 왕이 되어도 천민은 천민이라는 현실이, 쌓아올린 돈더미보다 무겁게 만득의 어깨를 짓눌렀습니다.
※ 4: 돈을 빌리러 온 양반 앞에서 만득이 처음으로 신분의 벽을 실감한다
만득이 서른여덟 되던 해의 어느 겨울날, 한양 별채에 예기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하인이 와서 알리기를, 은진 송씨 집안의 맏아들 송영달이라는 양반이 찾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만득은 처음에 잘못 들은 줄 알았습니다. 은진 송씨라면 충청도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였습니다. 송판서, 즉 송영달의 아버지는 이조판서까지 지낸 인물이었고, 그 집안의 족보에는 삼대에 걸쳐 정승과 판서가 줄줄이 이름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집안의 맏아들이, 노비 출신 장사꾼의 집에 찾아오다니. 만득은 옷매무새를 고치고 대문 앞으로 나갔습니다.
송영달은 사십 줄에 들어선 양반이었는데, 첫눈에 봐도 형편이 좋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도포가 오래되어 소매 끝이 닳아 있었고, 갓 아래 머리카락이 제대로 빗질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눈에 띈 것은 그 눈빛이었습니다. 양반 특유의 당당함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수치심과 절박함이 뒤섞인 복잡한 빛이 서려 있었습니다. 만득은 송영달을 안으로 안내했습니다.
방 안에 앉은 송영달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차를 내밀어도 선뜻 손을 뻗지 못했고, 방 안을 둘러보는 눈빛이 편치 않았습니다. 천민의 집에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존심에 상처를 내고 있는 것이 역력했습니다. 만득은 그 기색을 눈치채고도 모른 척하며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이렇게 먼 길을 오셨으니 분명 사정이 있으실 것입니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송영달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사정은 이러했습니다. 송판서가 작년 겨울에 세상을 떠났는데, 돌아가시고 보니 집안 사정이 엉망이었습니다. 벼슬로 먹고살던 집안이라 농사짓는 전답이 변변치 않았고, 송판서가 살아 계실 때 벌인 사치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비단 옷, 중국산 도자기, 서화 수집, 잔치 비용, 이 모든 것이 빚이었습니다. 거기에 장례비가 엄청나게 들었습니다. 이조판서를 지낸 인물의 장례이니 체면치레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장례를 치르는 동안 빚이 두 배로 불어났습니다.
송영달은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한양의 이름난 부호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양반 부호, 역관 출신 거상, 중인 상인들을 모두 만나보았지만, 아무도 돈을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기우는 집안에 돈을 빌려봐야 돌아올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명문가의 이름값만으로는 돈을 빌릴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결국 송영달은 마지막 수단으로, 조선에서 가장 돈이 많다는 천민 출신 어물상을 찾아온 것입니다. 양반의 자존심을 버리고, 종놈의 집에 머리를 숙이러 온 것이었습니다.
만득은 송영달의 이야기를 다 듣고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만득의 마음속에서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쳤습니다. 이조판서까지 지낸 명문가의 아들이, 노비 출신 장사꾼 앞에 와서 돈을 빌려달라고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열 살의 자신이 보았다면 믿었을까요. 소금 짐을 지고 장터에 갈 때, 양반의 말 앞에서 길을 비키며 흙먼지를 뒤집어쓰던 그 시절의 자신이 보았다면, 세상이 이렇게 뒤집어질 수도 있구나 하고 놀랐을 것입니다. 양반이 천민에게 손을 내미는 것. 이것이야말로 조선 신분제도의 가장 날카로운 아이러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돈은 양반과 천민을 가리지 않으며, 돈 앞에서는 족보의 길이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만득은 이 순간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그러나 만득은 통쾌해하지 않았습니다. 만득이 느낀 것은 오히려 깊은 씁쓸함이었습니다. 양반이든 천민이든, 돈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하는 인간의 처지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서글펐습니다. 송영달의 굽힌 등을 보며 만득은 생각했습니다. 저 양반이 나를 찾아올 때 얼마나 고민했을까. 천민의 집에 발을 들이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 그 수치를 감수하고도 올 수밖에 없었던 절박함이 얼마나 컸을까.
만득은 송영달에게 말했습니다. 장례비를 빌려드리겠습니다. 이자는 받지 않겠습니다. 송영달의 눈이 크게 떠졌습니다. 이자를 받지 않는다는 말에, 송영달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습니다. 만득이 말을 이었습니다. 그 대신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송영달의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경계하는 눈빛이었습니다. 돈을 빌려주면서 조건을 다는 것은 장사꾼의 본능이니, 대체 무엇을 요구하려는 것인지 긴장이 된 것입니다. 만득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때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송영달은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만득은 장례비에 필요한 돈을 넉넉히 내어주었고, 거기에 더하여 당장 급한 빚을 갚을 수 있는 돈까지 보태주었습니다. 송영달은 돌아가면서 만득 앞에 깊이 절을 올렸습니다. 양반이 천민에게 큰절을 한 것입니다. 등을 숙이는 송영달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만득은 그 떨림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만득은 송영달이 떠난 뒤 빈 방에 앉아 오래도록 생각했습니다. 저 양반의 절보다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 내 아들이 양반 앞에서 절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내 손자가 천민이라는 말을 듣지 않는 세상. 돈은 충분히 벌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다. 이 돈으로 신분의 벽을 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정문으로는 갈 수 없다. 그렇다면 뒷문을 찾아야 한다. 뒷문이 없으면 벽에 구멍을 뚫어야 한다. 방법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것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다만 방법을 모를 뿐이다.
이날부터 만득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거대한 계획이 조용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 5: 만득이 의주 만상과 손잡고 대중국 무역에 뛰어들어
만득이 마흔이 되던 해, 만득의 장사는 서해안 어물을 넘어 전국 규모로 확장되어 있었습니다. 충청도와 전라도 해안의 어물 유통은 만득이 장악하고 있었고, 한양의 어물전과 곡물상에도 만득의 물건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득의 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장사꾼의 눈은 늘 더 큰 시장을 향하는 법이고, 조선 안에서 가장 큰 시장은 국경 너머 중국이었습니다.
만득에게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준 것은 한양에서 만난 의주 출신 상인 김유근이라는 자였습니다. 김유근은 의주 만상이었습니다. 만상이라 함은 의주를 거점으로 중국과의 국경 무역을 하는 상인 집단을 말하는데, 조선에서 가장 큰 돈이 오가는 무역이 바로 이 의주 만상들의 대중국 무역이었습니다. 사신 행차를 따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봉황성까지 가서, 중국 상인들과 물건을 교환하는 것이 만상의 주된 사업이었습니다.
김유근이 만득을 찾아온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만득의 어물이 한양에서 최고 품질로 이름이 나 있었는데, 중국 산둥성 상인들이 조선 어물, 특히 조선 굴비와 새우젓을 대량으로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유근의 제안은 이러했습니다. 자네의 어물을 나에게 넘기면, 내가 의주에서 중국 상인에게 팔아주겠네. 한양 값의 두 배 이상은 받을 수 있을 것이네. 나는 중간에서 이문을 좀 남기겠네.
만득은 즉시 관심을 보였지만, 김유근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만득의 장사 철학 중 핵심은 중간 상인을 최소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간에 사람이 끼면 이익이 줄어들고, 물건의 품질 관리가 어려워지며, 무엇보다 거래의 주도권을 잃게 됩니다. 만득은 어물 유통에서 이 원칙을 지켜 성공했고, 대중국 무역에서도 이 원칙을 관철시키려 했습니다.
만득은 김유근에게 역제안을 했습니다. 자네가 중간에서 이문을 남기는 것 대신, 나를 직접 의주로 데려가시오. 내가 중국 상인과 얼굴을 맞대고 거래하겠소. 자네에게는 안내비를 넉넉히 쳐주겠소. 김유근은 당황했습니다. 천민 출신 상인이 의주까지 올라와 중국 상인과 직접 담판을 벌이겠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의주 만상들 사이에서도 중국 상인과의 거래는 경험 많은 소수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바다 건너 서해안에서 올라온 어물상이 직접 하겠다니, 대담하다 못해 무모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김유근은 만득의 눈빛에서 물러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읽었습니다. 한양 어물전의 절반을 장악한 사내의 배짱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감지한 것입니다. 결국 김유근은 만득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만득은 대중국 무역을 위한 준비에 석 달을 투자했습니다. 서해안 포구에서 가장 좋은 굴비 천 두름을 골라 직접 소금에 절였고, 최상급 새우젓 오십 항아리를 준비했습니다. 거기에 자신의 비법으로 만든 전복포와 홍어포까지 더했습니다. 특히 만득이 공을 들인 것은 포장이었습니다. 중국 상인은 물건의 질뿐 아니라 겉모양도 중시한다는 정보를 김유근에게서 들은 만득은, 굴비를 짚 대신 깨끗한 한지로 싸고, 새우젓 항아리에 조선 특유의 문양을 새겨 넣었습니다. 물건 자체의 품질에 더하여, 물건의 격을 높인 것입니다.
한양에서 의주까지는 보름 길이었습니다. 소달구지 열 대에 어물을 가득 실은 만득의 행렬이 한양 서대문을 나섰을 때, 길 위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습니다. 노비 출신 상인이 소달구지 열 대를 이끌고 의주까지 올라간다는 소문은 이미 퍼져 있었고, 어떤 이는 대단하다고 했고, 어떤 이는 주제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만득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보름간의 여정 동안 만득은 김유근에게서 중국 상인과의 거래 관습, 흥정 방식, 주의할 점을 철저히 배웠습니다. 김유근이 놀란 것은 만득의 학습 속도였습니다. 글을 읽지 못하는 만득이 한 번 들은 것은 절대 잊지 않았고, 중국 화폐의 환산까지 머릿속으로 즉시 계산해냈습니다.
의주에 도착한 만득은 김유근의 안내로 중국 상인 왕서방을 만났습니다. 왕서방은 산둥성 출신의 대상인으로, 조선 의주 만상들과 이십 년 넘게 거래해온 노련한 무역상이었습니다. 흰 수염을 기른 육십 대의 왕서방은, 만득이 천민 출신이라는 것을 듣고 처음에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조선의 천한 놈이 나와 직접 거래하겠다고, 이것이 무슨 경우인가 하는 눈빛이었습니다.
그러나 만득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만득은 준비해 온 굴비 중 가장 좋은 것 한 두름을 왕서방 앞에 내놓았습니다. 왕서방이 굴비를 들어 냄새를 맡고, 하나를 뜯어 불에 구워 맛을 보는 순간, 왕서방의 표정이 변했습니다. 눈이 커졌고, 씹던 입이 멈추었다가 천천히 다시 움직였습니다. 지금까지 조선에서 사간 어물 중 이런 맛은 처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소금 간이 적절하여 짜지 않으면서도 감칠맛이 깊었고, 살이 꼬들꼬들하면서도 뼈에서 쉽게 발라졌습니다. 왕서방은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천민이든 양반이든, 물건이 좋으면 그것이 장사꾼의 자격이라는 것을 왕서방도 알고 있었습니다.
왕서방이 값을 부르자, 만득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여기서 만득의 세 번째 장사 원칙이 탄생합니다. 만득은 어물의 대가를 은전이나 동전으로 받는 대신, 중국산 비단과 약재로 받겠다고 했습니다. 왕서방은 의아해했지만, 만득의 계산은 이러했습니다. 중국산 비단은 의주에서 사면 한양 값의 절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한양에서 같은 비단을 팔면 두 배 이상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중국산 약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물을 팔아 돈을 받고, 그 돈으로 비단을 사는 것보다, 처음부터 어물과 비단을 직접 맞교환하면 두 번의 거래가 한 번으로 줄고, 중간 수수료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돈을 거래하지 말고, 물건을 거래하라. 돈은 어디서나 같은 값이지만, 물건은 장소에 따라 값이 달라진다. 이 원칙으로 만득은 의주에서 어물을 비단으로 바꾸고, 한양에서 비단을 돈으로 바꾸고, 그 돈으로 다시 서해안에서 어물을 사들이는 순환 구조를 완성했습니다. 물건이 한 바퀴 돌 때마다, 투자한 돈이 세 배로 불어나는 구조였습니다.
왕서방과의 첫 거래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왕서방은 만득의 어물을 극찬하며 정기적인 거래를 제안했고, 만득은 매 분기 한 번씩 의주를 방문하여 왕서방과 대량 거래를 이어갔습니다. 일 년 만에 만득의 대중국 무역 이익은 국내 어물 장사 이익을 넘어섰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만득은 왕서방 외에도 산둥성과 하북성의 중국 상인 네 명과 정기 거래를 하게 되었고, 의주 만상들 사이에서도 만득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마흔다섯이 되었을 때, 만득의 재산은 조선에서 손꼽히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운반선 열두 척, 소달구지 삼십 대, 한양과 의주와 서산에 창고와 기와집을 두었고,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이백 명을 넘겼습니다. 양반가 중에서도 만득보다 재산이 많은 집은 한양 전체에 열 집이 될까 말까 했습니다. 그러나 만득은 여전히 관청에 가면 마당에 무릎을 꿇어야 했고, 양반을 만나면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여야 했습니다. 재산은 조선 최고였지만 신분은 여전히 최하였습니다. 만득의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불씨 하나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습니다. 이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면, 만득의 장사 인생은 완성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 6: 아들의 과거 응시가 신분 때문에 거부당하고
만득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름은 만복이었습니다. 만득이 만복의 이름을 지을 때 만 가지 복을 받으라는 뜻을 담았는데, 사실 만득이 만복에게 바라는 복은 딱 하나였습니다. 아비 세대에서 이루지 못한 것, 천민의 굴레를 벗는 것이었습니다. 만득은 자신이 평생을 바쳐 돈을 벌었지만, 돈만으로는 세상이 자신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습니다. 아들만은 다른 세상을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만득은 만복이 다섯 살 때부터 글을 가르쳤습니다. 서산에는 변변한 서당이 없었기에, 만득은 한양에서 훈장을 데려왔습니다. 천민의 아들을 가르치겠다는 훈장이 쉽게 나서지 않았지만, 만득의 돈이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만득이 내건 속수는 보통 양반가의 세 배였고, 그 돈에 마음이 움직인 나이 든 훈장이 서산까지 내려와 만복을 가르쳤습니다. 만복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타고난 머리가 좋았고, 무엇보다 집중력이 뛰어났습니다. 훈장이 한 번 읽어준 문장을 통째로 외우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열 살이 되기 전에 천자문과 소학을 떼었습니다. 열여섯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읽었고, 글짓기 실력이 한양의 양반 자제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만득은 만복의 실력을 보며 확신했습니다. 이 아이가 과거에 응시하면 반드시 급제할 수 있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오르면, 천민의 아들이 아니라 조정의 관리로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것이 만득이 그린 큰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만득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만복이 열여덟이 되어 과거 소과에 응시하려 관아에 원서를 제출했을 때, 관아의 이방이 원서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방이 말했습니다. 아비가 천민이면 자식도 천민이오. 천민은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없소. 이것은 국법이오.
만득은 직접 서산 관아를 찾아갔습니다. 흉년 때 곡물을 풀어 백성을 구한 인연이 있는 서산 현감에게 사정을 호소했습니다. 현감은 만득의 사정을 이해한다고 했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습니다. 만득, 자네 마음은 이해하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조정의 법도가 그러하니, 천민의 자식은 과거를 볼 수 없소. 내가 눈을 감아준다 해도, 다른 고을에서 이의를 제기하면 자네 아들만 난처해지오.
만득은 관아를 나오며 이를 악물었습니다. 돈은 넉넉하고, 아들의 실력은 충분하며, 훈장조차 이 아이는 장원급제감이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단 하나, 아비가 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시험조차 볼 수 없다니. 이것이 조선이었습니다. 양반은 멍청해도 과거를 볼 수 있었고, 천민은 천재여도 과거를 볼 수 없었습니다. 신분이라는 벽은 돈으로도, 실력으로도, 인맥으로도 정면 돌파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만득은 서산 기와집 뒷마루에 앉아 술을 마셨습니다. 평소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사람이 항아리 하나를 비울 만큼 마셨습니다. 달을 올려다보며 만득은 중얼거렸습니다. 소금 서른 근을 지고 금산까지 걸었던 열다섯의 나, 흉년에 곡물을 사들이며 미친놈 소리를 들었던 스물일곱의 나, 의주에서 중국 상인 앞에 굴비를 내놓던 마흔의 나. 그 모든 세월 동안 나는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정문이 막히면 뒷문을 찾았고, 뒷문이 막히면 창문을 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정문으로 갈 수 없다면, 뒷문을 찾으면 된다.
만득은 술기운을 빌려 머릿속을 정리했습니다. 과거에 응시하려면 양반 신분이 필요하다. 천민이 양반이 되는 공식적인 방법은 없다. 하지만 비공식적인 방법은 있을 수 있다. 만득은 한양에서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습니다. 가난해진 양반가가 돈을 받고 족보에 이름을 올려주는 일이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 그리고 수년 전, 송영달에게 돈을 빌려주며 했던 자신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만득의 눈이 달빛 아래에서 번뜩였습니다. 그 때가 온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만득은 숙취에도 불구하고 일찍 일어나 한양으로 올라갔습니다. 송영달을 바로 찾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득은 먼저 한양의 경아전 출신 인맥, 관아 서리, 호적을 다루는 하급 관리들을 만나 조선의 신분 제도를 샅샅이 조사했습니다. 납속이라 하여 나라에 곡식이나 돈을 바치고 신분을 올리는 방법이 있었지만, 이것은 천민에서 양인으로 올려줄 뿐 양반으로 만들어주지는 않았습니다. 공명첩이라 하여 나라에서 파는 빈 벼슬 임명장을 사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것도 실질적인 양반 지위를 보장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방법도 완전하지 않았지만, 만득은 조사를 거듭하며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족보를 사는 것이다.
※ 7: 만득이 몰락 양반가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는 놀라운 우회 전략을 실행한다
조선시대 양반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요. 벼슬도 중요했고, 학식도 중요했지만, 양반이라는 신분의 가장 물리적인 증거는 족보였습니다. 족보에 이름이 올라가 있으면 양반이었고, 올라가 있지 않으면 양반이 아니었습니다. 관아에서 신분을 확인할 때도, 혼인을 할 때도, 과거에 응시할 때도, 결국 따지는 것은 족보였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족보에 이름을 올릴 수만 있다면 천민도 양반 행세를 할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법으로 엄격히 금지된 일이었습니다. 족보를 위조하거나 남의 족보에 이름을 끼워 넣는 행위는 사문서 위조에 해당했고, 발각되면 유배형에 처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 금지는 점점 느슨해지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양반 중에 가난해진 집안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벼슬이 끊기고 전답이 줄어든 양반가에서, 돈을 받고 몰래 족보에 이름을 올려주는 일이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양반에게는 돈이 필요했고, 천민에게는 이름이 필요했습니다. 수요와 공급이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만득은 이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이것을 실행할 최적의 상대도 이미 마음속에 정해두고 있었습니다.
만득이 눈여겨본 집안은 은진 송씨, 바로 몇 해 전 장례비를 빌려주었던 송영달의 집안이었습니다. 송씨 집안을 택한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은진 송씨는 대대로 정승과 판서를 배출한 명문이었으므로, 이 족보에 이름이 올라가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격이 높았습니다. 둘째, 송판서가 세상을 떠난 뒤 집안이 급격히 기울어, 돈이 절실한 상태였습니다. 셋째, 만득은 이미 송영달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놓았으므로,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운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맞아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만득은 수년 전 송영달에게 돈을 빌려줄 때 이미 이 순간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득의 장사 원칙 중 신용을 먼저 쌓으라는 것이, 여기서 다시 한번 빛을 발한 것이었습니다.
만득은 한양에서 송영달을 찾아갔습니다. 송영달의 형편은 몇 해 전보다 더 나빠져 있었습니다. 만득이 갚아준 빚 외에 새로운 빚이 또 쌓여 있었고, 선산의 땅 절반을 팔아야 할 처지였습니다. 만득은 송영달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그러나 명확하게 제안을 꺼냈습니다.
어른의 남은 빚을 모두 갚아드리겠습니다. 팔려는 선산도 제가 사서 어른 이름으로 돌려드리겠습니다. 거기에 논 열 마지기를 더 보태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만득은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습니다. 내 아들 만복을 은진 송씨 족보에 올려주십시오. 양자의 형식이든, 먼 친척의 형식이든 방법은 상관없습니다. 족보에 이름만 올려주시면 됩니다.
방 안에 긴 침묵이 흘렀습니다. 송영달의 얼굴이 단단하게 굳었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양반가의 족보에 천민의 아들을 올린다는 것은, 조상의 명예를 파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삼대에 걸쳐 정승과 판서를 배출한 은진 송씨의 족보에, 노비의 피가 섞인 이름을 올린다는 것. 송영달의 자존심이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송영달의 현실은 자존심보다 더 무거웠습니다. 빚에 쫓기고, 아버지의 제사상조차 제대로 차리지 못하며, 선산까지 남의 손에 넘겨야 하는 처지에서, 만득의 제안은 구원의 손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송영달은 사흘을 고민했습니다. 밤마다 사당에 나가 조상의 위패 앞에 앉아 괴로워했습니다.
결국 송영달은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만복을 직접 족보에 올리는 것은 눈에 너무 띈다. 우회하자. 송영달의 셋째 삼촌은 자식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니 이의를 제기할 자가 없고, 그 삼촌의 양자로 만복을 올리면 족보 수정 시 자연스럽게 이름을 끼워 넣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양자이니, 살아 있는 친척들에게도 들킬 위험이 적었습니다.
만득은 이 방법을 즉시 받아들였습니다. 만득은 세부 사항에도 빈틈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족보 수정에 참여하는 문중 어른 두 명에게도 넉넉한 사례를 전했고, 호적을 관리하는 관아 서리에게도 손을 써서 호적상의 이름을 박만복에서 송만복으로 바꾸었습니다. 모든 과정이 은밀하게, 그러나 철저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렇게 만복은 은진 송씨 족보에 송만복이라는 이름으로 올라갔습니다. 천민 박만복이 양반 송만복이 된 것입니다. 만득은 약속대로 송영달의 빚을 모두 갚아주었고, 선산을 되찾아주었으며, 논 열 마지기를 보태주었습니다. 돈으로 따지면 만득의 전 재산의 삼분의 일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나 만득은 이 돈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소금 서른 근을 등에 지고 금산까지 닷새를 걸었던 것도, 흉년에 곡물을 사들이며 미친놈 소리를 들었던 것도, 의주에서 중국 상인과 담판을 벌였던 것도, 결국 이 한 순간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평생 장사로 번 돈 중 가장 값진 투자. 만득은 이것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만복은 은진 송씨의 양반 자제로서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만득은 만복을 한양 최고의 서당에 보내 과거를 준비시켰습니다. 만복은 아버지의 장사 머리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성실함을 모두 갖춘 아이였고, 삼 년간의 집중적인 준비 끝에 소과에 합격했습니다. 합격 소식을 전해 들은 만득은 서산 기와집 뒷마당에 혼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눈물이 주름진 볼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닦지 않았습니다.
※ 8: 만득의 손자가 과거에 급제하고 세 세대에 걸친 신분 역전이 완성된다
만복이 소과에 합격한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만득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만복에게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하되, 장사의 원리 또한 반드시 가르쳤습니다. 만득이 아들에게 늘 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벼슬은 임금이 주고 빼앗는 것이다. 언제든 잘릴 수 있고, 정치에 휘말리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 그러나 장사로 번 재산은 네 것이다. 양반의 이름과 장사꾼의 머리를 모두 가져라. 이름만 있고 돈이 없으면 송판서 꼴이 되고, 돈만 있고 이름이 없으면 네 아비 꼴이 된다. 둘 다 가져야 진짜 힘이다. 그것이 이 아비가 네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이다.
만복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과거 공부를 하면서도 아버지의 장사를 곁에서 도왔고, 특히 한양에서의 인맥 관리에 남다른 능력을 보였습니다. 양반의 이름으로 양반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된 만복은, 아버지가 천민 신분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던 자리에 들어갔습니다. 양반가의 잔치에 초대받고, 시회에 참석하고, 조정의 하급 관리들과 술자리를 함께하며 장사에 유용한 정보와 인맥을 쌓았습니다. 어떤 고을에 새 현감이 부임한다는 소식, 어떤 물자를 관에서 대량 매입한다는 소문, 이런 정보들이 양반의 자리에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이었고, 만복은 이 정보를 아버지에게 전달하여 장사에 활용했습니다.
만득은 쉰을 넘기면서 서서히 사업의 실권을 만복에게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만복은 아버지가 닦아놓은 어물 유통망과 대중국 무역로 위에 새로운 사업을 쌓아올렸습니다. 한양 도성 안에 미곡상을 열어 궁궐과 관아에 곡물을 납품했고, 종로에 포목점을 내어 의주에서 들여온 중국산 비단을 한양 양반가에 팔았습니다. 의주 무역도 품목을 넓혔습니다. 어물과 비단에서 시작한 것이 인삼, 모피, 종이, 철물로 확장되었고, 만복의 대에서 거래 규모는 만득 때의 세 배로 커졌습니다.
아버지가 천민의 몸으로 뼈를 깎아 만든 장사 왕국을, 아들이 양반의 이름과 양반의 인맥으로 한 단계 더 키운 것입니다. 만득이 열다섯에 소금 서른 근으로 시작한 장사가, 만복의 대에 이르러 조선 팔도를 아우르는 상업 제국이 된 것이었습니다.
만복이 서른다섯 되던 해, 만복의 아들이자 만득의 손자인 송학준이 태어났습니다. 만득이 예순하나 되던 해의 경사였습니다. 만득은 한양에서 손자의 출생 소식을 듣고, 소달구지를 타고 하루 만에 서산으로 내려왔습니다. 갓 태어난 손자를 품에 안은 만득은, 그 작은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습니다. 주름진 만득의 손이, 손자의 작고 부드러운 손을 감싸 쥐었습니다. 소금에 절어 갈라지고, 지게에 짓눌려 굳은살이 박힌, 거칠고 두꺼운 손이었습니다. 그 손 안에 놓인 손자의 손은 어찌나 작고 부드러운지, 만득은 힘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만득이 만복에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양반이다. 족보에 당당히 이름이 올라가 있고, 과거에 응시할 수 있으며, 양반의 아들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이 아이는 장터에서 양반 말 앞에 길을 비키지 않아도 되고, 관아에서 마당에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며, 누구 앞에서든 고개를 곧추세우고 살 수 있다. 만득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소금장수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천민의 굴레를 쓰고 살았지만, 이 아이에게만은 그 굴레를 물려주지 않았다. 그것이면 족하다.
만득은 예순셋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산 기와집에서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 만득은 만복의 손을 잡고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돈은 도구다. 도구로 쓸 때 값진 것이지, 쌓아두면 돌덩이에 불과하다. 네 아들에게도 이것을 가르쳐라.
만득의 장례에는 한양에서 서산까지 수백 명의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어물전 상인들, 포구의 어부들, 의주의 만상들, 그리고 수십 년 전 흉년에 만득이 끓여준 죽을 얻어먹었던 노인들까지. 한 노인이 만득의 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며 말했습니다. 이 분이 죽을 끓여주지 않았으면, 내 자식들은 그 겨울을 넘기지 못했을 것이오. 서산 현감도 조문을 왔습니다. 천민의 장례에 고을 수령이 조문하는 것은 들어본 적 없는 일이었지만, 만득이라면 그럴 자격이 충분했습니다.
그로부터 이십 년 뒤의 일입니다. 만득의 손자 송학준이 과거 대과에 급제했습니다. 은진 송씨 양반 가문의 자제로서, 당당히 문과에 합격한 것입니다. 학준은 이후 벼슬길에 올라 군수까지 지냈습니다. 노비의 손자가, 한 고을을 다스리는 군수가 된 것입니다. 소금장수의 아들이 장사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아들에게 양반의 이름을 사주고, 양반이 된 아들이 키운 손자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오르기까지. 삼대에 걸친 신분 역전이 마침내 완성된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만득과 같은 사례는 조선 후기에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영조 시대에 조선 전체 인구의 양반 비율은 일 할 남짓이었지만, 고종 시대에 이르면 그 비율이 칠 할을 넘어섭니다. 백 년 사이에 양반이 일곱 배로 늘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양반이 아이를 많이 낳아서가 아닙니다. 돈을 번 평민과 천민들이 족보를 사서 양반 행세를 한 결과입니다. 조선의 신분제도는 위에서 법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돈에 의해 서서히 허물어진 것입니다. 만득 같은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백 명, 천 명 쌓이면서, 양반과 천민의 경계선이 흐려지고, 마침내 그 선 자체가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만득의 이야기는 단순한 성공담이 아닙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벽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정문이 막히면 뒷문을 찾고, 뒷문이 막히면 벽 자체를 우회하는 길을 만들어낸 한 인간의 집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만득이 평생 지킨 세 가지 장사 원칙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전하겠습니다. 첫째, 물건의 가치는 물건 자체가 아니라 장소가 결정한다. 둘째, 당장의 이익보다 오래갈 신용을 먼저 쌓아라. 셋째, 돈을 거래하지 말고 물건을 거래하라. 소금장수의 아들이 몸으로 익힌 이 원칙들은, 사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아니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여전히 유효한 진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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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서른 근을 등에 지고 장터에 섰던 열두 살 소년이, 삼대에 걸쳐 조선의 신분 질서를 뒤집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다던 신분을, 끈기와 머리와 신용으로 우회한 조선의 거상 만득. 여러분의 삶에도 넘고 싶은 벽이 있으신가요? 댓글로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르신들의 구독과 좋아요는 다음 만복야담의 큰 힘이 됩니다. 다음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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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inematic 16:9 photorealistic scene set in Joseon Dynasty Korea during golden hour. A weathered but dignified middle-aged Korean man in humble commoner clothing stands at the center of a grand traditional Korean marketplace, his posture upright and confident despite his lowly attire. He holds a large sack of coarse sea salt over one shoulder with one powerful arm. Behind him stretches an enormous merchant empire: towering stacks of dried fish bundles wrapped in straw, rows of ceramic jars filled with salted seafood, wooden crates of goods, and traditional Korean trading ships visible at a distant harbor. On both sides, well-dressed yangban aristocrats in fine silk hanbok look at him with mixed expressions of envy and grudging respect. Dramatic golden sunlight breaking through clouds illuminates the man from behind, creating a heroic silhouette effect. Rich warm earth tones, dust particles floating in shafts of light, weathered wooden market stalls with traditional tile roofs in the background. Shallow depth of field, cinematic anamorphic lens flare, film grain texture, epic scale composition emphasizing the contrast between humble origins and vast wealth. No t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