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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며느리가 눈보라 속에서 만난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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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의 매서운 눈초리, 남편의 무관심, 끝이 보이지 않는 시집살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며느리는 한겨울 밤,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채 집을 뛰쳐나옵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산길에서 쓰러지기 직전, 길가에서 더 초라한 모습으로 떨고 있는 한 할머니를 발견합니다.
자기도 죽을 판인데, 그 할머니를 차마 지나칠 수 없었던 며느리.
그날 밤 며느리가 한 선택 하나가, 평생의 운명을 통째로 바꿔놓습니다.
과연 눈보라 속 그 할머니는 누구였으며, 며느리에게 어떤 복이 찾아왔을까요?
※ 1: 며느리 순이의 고된 시집살이 일상
새벽닭이 울기도 전에 부엌에 불이 들어옵니다.
경상도 안동 땅, 양반 김 진사 댁. 큰 기와집 안채 부엌에서 스물두 살 며느리 순이가 무릎을 꿇고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습니다. 손끝이 갈라지고 피가 맺혀 있지만 호호 불어가며 장작을 밀어 넣습니다.
'오늘도 해 뜨기 전에 일어났으니 혼나진 않겠지.'
장독대에서 간장 항아리 뚜껑을 열다가 손이 미끄러져 뚜껑이 바닥에 떨어집니다. 와장창, 소리가 고요한 새벽 공기를 쩌렁쩌렁 울립니다.
"이년이 또 살림을 부쉈느냐!"
안방에서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날아옵니다. 순이는 허겁지겁 깨진 뚜껑 조각을 주워 담으며 고개를 숙입니다.
"죄송합니다, 어머님."
시어머니 박 씨가 지팡이를 짚고 부엌으로 나옵니다. 겨울 새벽 찬 공기에 기침을 하면서도 눈매는 서릿발처럼 날카롭습니다.
"죄송하면 다냐. 네가 시집온 지 삼 년이 다 되도록 살림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어. 장독 뚜껑이 몇 푼인 줄 아느냐."
"제가… 손이 미끄러져서…"
"변명은 집어치워라. 아침상이나 똑바로 차려 올려. 진사 어른 진지상에 흠이라도 있으면 그날은 너도 밥을 먹을 생각 마라."
순이는 입술을 꽉 깨물고 아궁이 앞으로 돌아갑니다. 솥에 물이 끓기 시작하면서 뿌연 김이 올라옵니다. 그 김 사이로 순이의 눈가가 붉어집니다.
'울지 마라. 울면 또 혼난다.'
순이의 친정은 안동에서 삼십 리 떨어진 산골 마을입니다. 아버지는 시골 훈장이었고 어머니는 삼 년 전 순이를 시집보낸 뒤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아버지 혼자 계신 친정에 돌아가 봤자 늙은 아버지의 짐만 될 뿐이라는 것을, 순이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아침상을 차려 사랑채로 올립니다. 밥, 국, 나물 세 가지, 간장 종지, 김치. 반듯하게 놓았지만 시어머니가 상을 훑어봅니다.
"나물에 참기름이 빠졌구나."
"어머님, 참기름 항아리가 바닥이 나서…"
"네 친정에서 참기름 한 동이 가져온 적이 있느냐? 빈손으로 시집와서 살림만 축내는 년이."
순이는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 옆에 앉아 밥을 떠먹는 남편 김도령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습니다.
'서방님이라도 한마디 해주시면… 아니다. 기대하지 말자.'
남편 김도령은 과거 공부에만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아내에게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 앞에서 아내의 편을 들 배짱은 없습니다. 아버지 김 진사는 일찍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사랑채에서 책만 읽으며 안채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습니다. 이 집의 안살림은 온전히 시어머니 박 씨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점심나절, 순이는 빨래를 하러 개울로 내려갑니다. 얼음이 얇게 언 개울물에 손을 담그니 살이 에이는 듯합니다. 손마디가 빨갛게 부어오르지만 빨랫방망이를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순이야."
이웃집 며느리 갑순이가 빨래 보따리를 들고 옆에 앉습니다.
"얼굴이 왜 그래. 또 혼났어?"
"아녀, 괜찮아."
"괜찮긴. 눈이 퉁퉁 부었구먼. 시어머님이 또 뭐라 그러셨어?"
순이는 대답 대신 빨래를 내리칩니다. 방망이 소리가 탁, 탁, 탁, 개울가에 울립니다.
갑순이가 한숨을 쉽니다.
"순이야, 나는 네가 진짜 걱정돼. 네 시어머님이 저 동네에서도 소문난 분이잖아. 전에 첫째 며느리도 결국 못 견디고 도망갔다며?"
순이의 손이 멈춥니다.
"… 첫째 며느리?"
"몰랐어? 네 시어머님 큰아들 며느리가 시집살이를 못 견디고 3년도 안 돼서 도망갔대. 그 뒤로 큰아들이 다른 데 장가를 가버려서 지금은 왕래도 안 한다더라."
순이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가슴이 덜컹합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저렇게 매서운 건가. 며느리에게 한 번 배신당하셨으니…'
그날 저녁, 순이는 부엌에서 저녁상을 차리다가 칼에 손을 베입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가락을 헝겊으로 감싸며 순이는 가만히 벽에 기댑니다.
'나는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는 걸까.'
바깥에서 바람 소리가 거셉니다. 올겨울 들어 가장 매서운 추위가 온다고 마을 어른들이 말했습니다.
순이는 헝겊을 감싼 손을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갈라진 손등, 칼에 베인 상처, 동상 걸린 손끝. 이 손이 스물두 해를 산 여인의 손이라고는 믿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이 집을 나가면 어떨까.'
순이는 스스로 그 생각에 놀라 고개를 흔듭니다. 하지만 한 번 스친 생각은 눈보라처럼 점점 세차게 머릿속을 채워갑니다.
저녁상을 올리는데 시어머니가 국을 한 숟갈 떠먹더니 상을 밀칩니다.
"이게 국이냐 물이냐. 네 친정에서는 이런 맹물에 밥을 말아 먹었더냐."
순이의 입술이 파르르 떨립니다.
'더는… 못 참겠다.'
※ 2: 참다못한 순이가 한겨울 밤 집을 뛰쳐나감
그날 밤, 모든 식구가 잠든 뒤 순이는 부엌에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화로의 불씨가 빨갛게 눈을 뜨고 있습니다. 순이는 그 불씨를 한참 바라봅니다. 불씨 하나가 꺼지고, 또 하나가 꺼집니다.
'나도 저 불씨처럼 꺼져가고 있구나.'
순이는 일어섭니다. 솜저고리 위에 겹치마를 두르고 버선 위에 짚신을 신습니다. 보따리 하나 쌀 겨를도 없습니다. 주먹밥 두 덩이를 치마폭에 싸고, 문을 밀고 나옵니다.
바깥은 칠흑같은 어둠입니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그러다가 점점 굵어져 이내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눈보라가 몰아칩니다.
'그래도 간다. 여기보다는 낫다.'
순이는 마을 뒤 산길로 올라갑니다. 이 길을 넘으면 영주 쪽으로 이어지는 큰길이 나옵니다. 큰길에 나가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거라고, 순이는 막연히 생각합니다.
하지만 산길은 낮에도 험한 곳입니다. 한겨울 밤에, 그것도 눈보라 속에 이 길을 걷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눈이 무릎까지 쌓여 한 발짝 떼기가 어렵습니다. 바람이 얼굴을 후려치고, 눈송이가 눈 속으로 파고듭니다. 순이는 이를 악물고 걷습니다.
'친정에 가면… 아버지가 계시잖아. 아버지 밥이라도 해드리면서 살면 되잖아.'
하지만 친정까지는 삼십 리가 넘습니다. 이 눈보라 속에서 삼십 리를 걸을 수 있을까. 순이의 발은 이미 감각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한 시진쯤 걸었을까. 고개 중턱에 이르렀을 때 바람이 더욱 거세집니다. 나무가 꺾이는 소리가 들리고, 눈보라가 회오리를 일으킵니다. 순이는 나무둥치를 붙잡고 몸을 웅크립니다.
'여기서 죽는 건가.'
손발의 감각이 사라지고, 몸이 점점 무거워집니다. 눈꺼풀이 내려옵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다시는 뜨지 못할 거라는 걸 알지만, 저항할 힘이 없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신 어머니…'
순이는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시집가던 날 어머니가 쥐어준 따뜻한 손. "순아, 시집가서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뎌라. 참으면 복이 온단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돕니다.
그때입니다. 바람 소리 사이로 무언가 다른 소리가 들립니다.
끼이이… 끼이이…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아닙니다. 사람의 신음 소리입니다. 순이는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뜹니다.
'누가 있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눈보라 사이로, 길 옆 바위 아래에 무언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검은 덩어리. 순이는 기어가듯 다가갑니다.
사람입니다.
흰 눈에 반쯤 파묻힌 노인. 작은 체구에 남루한 옷차림. 얼굴은 눈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아직 살아 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 괜찮으세요?"
순이는 노파의 어깨를 흔듭니다. 노파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갑습니다.
'이 할머니도 나처럼 산을 넘으려다 쓰러진 건가.'
순이는 잠시 망설입니다. 자기도 지금 죽을 판입니다. 이 할머니를 데리고 가면 둘 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 할머니를 두고 가면, 이 할머니는 틀림없이 여기서 얼어 죽는다.'
순이는 결심합니다. 노파를 등에 업습니다. 노파는 깃털처럼 가볍습니다. 너무 가벼워서 오히려 마음이 아픕니다.
"할머니, 조금만 견디세요. 제가 어디든 데려갈게요."
눈보라 속을 다시 걷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내려갈 곳을 찾아야 합니다. 고개를 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쪽으로, 바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갑니다.
얼마를 걸었을까. 나무 사이로 뭔가 어두운 윤곽이 보입니다. 지붕. 집입니다.
가까이 가보니 오래전에 버려진 듯한 초가집입니다. 지붕은 반쯤 무너졌지만 한쪽 방은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문을 밀자 삐걱 소리와 함께 열립니다.
"할머니, 여기서 쉬어요."
순이는 노파를 방 안에 눕히고, 주위를 둘러봅니다. 방 한구석에 나뭇가지들이 쌓여 있습니다. 이전에 누군가 땔감으로 모아둔 듯합니다. 아궁이도 있습니다.
순이는 떨리는 손으로 부싯돌을 찾습니다. 다행히 치마폭에 넣어둔 부시가 있습니다. 시집살이 삼 년에 익숙해진 불 때는 솜씨가 여기서 빛을 발합니다.
부시를 여러 번 부딪히자 마른 풀에 불꽃이 옮겨붙습니다. 작은 불씨가 나뭇가지로 번지고, 이윽고 아궁이에서 불이 타오릅니다.
"할머니, 불 피웠어요. 이제 좀 따뜻해질 거예요."
순이는 자신의 겹치마를 벗어 노파에게 덮어줍니다. 그러고는 노파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비벼줍니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눈보라가 미친 듯이 몰아칩니다. 하지만 방 안에는 작은 온기가 퍼져갑니다.
※ 3: 쓰러지기 직전 눈 속에 파묻힌 노파를 발견
불이 타오르자 방 안이 조금씩 밝아집니다. 순이는 비로소 노파의 얼굴을 제대로 봅니다.
깊이 파인 주름, 하얗게 센 머리카락, 그리고 닫힌 눈.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습니다. 하지만 가느다란 숨소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할머니, 눈 좀 떠보세요. 여기 따뜻해요."
순이는 노파의 손을 계속 비비며 입김을 불어넣습니다. 노파의 손가락이 살짝 꿈틀합니다.
'움직였어. 살아계셔.'
순이는 치마폭에 넣어두었던 주먹밥을 꺼냅니다. 두 덩이 중 하나를 작게 떼어 노파의 입가에 갖다 댑니다.
"할머니, 이거 드세요. 주먹밥이에요. 많이는 못 해왔지만…"
노파의 입이 미약하게 움직입니다. 순이는 밥알을 하나씩 노파의 입안에 넣어줍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이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한참이 지나자 노파의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돕니다. 닫혀 있던 눈꺼풀이 떨리더니 천천히 열립니다.
"아이고…"
노파가 낮은 신음을 내며 눈을 뜹니다. 흐릿한 눈동자가 순이를 향합니다.
"여기가… 어디냐…"
"할머니, 산중의 빈집이에요. 눈보라가 너무 심해서 여기로 모셔왔어요."
노파가 고개를 천천히 돌려 주위를 둘러봅니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 그 앞에 앉아 자기 손을 잡고 있는 젊은 여인.
"네가… 나를 업어왔느냐?"
"네, 할머니."
"이 눈보라에… 너 혼자서?"
"네."
노파의 눈에 물기가 맺힙니다. 주름진 손이 순이의 손등을 더듬습니다.
"이 손이… 아이고, 이 손이 갈라졌구나. 이 고생을 하면서 늙은 것을 업어왔단 말이냐."
순이는 얼른 손을 뺍니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네 손이 이렇게 된 건 고된 살림을 했다는 뜻이여. 시집살이가 힘들었지?"
순이는 뜨끔합니다.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립니다.
"… 어쩌다 이 밤에 산길에 나오셨어요, 할머니?"
노파가 기침을 한 번 하고 천천히 말합니다.
"나는 영주 쪽에서 오는 길이었어. 딸네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인데, 날이 갑자기 나빠지는 바람에 꼼짝을 못 하게 됐지."
"딸이 계세요? 그럼 딸네 집에서 눈이 그칠 때까지 계시지 그러셨어요."
노파가 쓴웃음을 짓습니다.
"딸이 있어도 사위가 탐탁지 않게 여기면 며칠도 못 있는 게야. 늙은 장모가 눈칫밥 먹는 꼴을 딸이 볼까 봐 하루도 더 있고 싶지 않았어."
순이의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이 할머니도 나랑 같구나. 갈 곳이 없는 사람.'
"할머니, 저도 사실은…"
순이는 입을 열었다가 멈춥니다. 자기가 시집을 도망쳐 나온 며느리라는 것을 이 할머니에게 말해도 되는 건지 망설여집니다.
노파가 순이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말해보려무나. 이 눈보라 속에서 젊은 여인이 혼자 산을 넘으려 했다는 건, 보통 사연이 아닐 게야."
순이의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립니다. 한 번 터진 눈물은 걷잡을 수 없습니다.
"저… 시집에서 나왔어요. 더 못 견디겠어서요."
"시어머니가 모질었느냐?"
"네… 아니, 모르겠어요. 제가 못나서 그런 건지, 어머님이 원래 그러신 건지. 삼 년 동안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어요. 남편은 과거 공부한다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시아버지는 안채 일에 관심도 없으시고. 저 혼자 살림하고 구박받고 살림하고 구박받고…"
순이는 울먹이며 말을 쏟아냅니다. 노파는 한마디도 끊지 않고 끝까지 듣습니다.
한참을 울고 난 뒤 순이가 코를 훌쩍입니다.
"그래서 오늘 밤, 참다 참다 못해서 그냥 나와버렸어요. 죽더라도 이 산 넘어서 친정에라도 가자 하고."
노파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입니다.
"그래, 힘들었겠구나."
단 한마디. 그런데 그 한마디가 순이의 가슴에 깊이 파고듭니다. 삼 년 동안 아무도 해주지 않은 말. '힘들었겠다.' 그 말 한마디에 순이는 또다시 눈물이 쏟아집니다.
노파가 순이의 등을 쓸어줍니다. 얼음처럼 차갑던 손이 어느새 미지근해져 있습니다.
"울어라, 울어. 실컷 울어야 속이 시원하지."
순이는 한참을 웁니다. 폐가의 작은 방 안에서, 눈보라 소리와 불 타는 소리와 순이의 울음소리가 뒤섞입니다.
※ 4: 폐가에서 불을 피우고 노파를 간호
울음이 그치자 순이는 부끄러운 듯 눈물을 닦습니다.
"죄송해요, 할머니. 처음 만난 분 앞에서 이렇게…"
"미안할 거 뭐가 있어. 사람이 울고 싶을 때 울어야지. 참기만 하면 그게 병이 돼."
노파가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앉습니다. 순이가 얼른 다가가 등 뒤에 나뭇짐을 받쳐줍니다.
"할머니, 등이 차가우실까 봐."
"이것 봐라,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면서."
노파가 피식 웃습니다. 순이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삼 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와 편하게 웃는 것 같습니다.
불이 타면서 방 안이 제법 따뜻해집니다. 바깥의 눈보라 소리는 여전하지만, 이 작은 방만큼은 별세계처럼 아늑합니다.
노파가 불꽃을 바라보며 말합니다.
"아까 네 이야기를 들으니, 시어머니가 첫째 며느리한테 한번 당한 뒤로 마음이 닫힌 것 같구나."
순이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웃집 아주머니한테 들었어요. 첫째 며느리가 도망갔다고."
"그럼 네 시어머니 입장도 한번 생각해 보렴. 며느리를 정성껏 가르치려 했는데 도망을 가버렸으니, 얼마나 서운했겠느냐. 사람이 한 번 배신당하면 다시는 마음을 안 여는 법이야."
순이는 가만히 듣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네가 잘못한 건 아니여. 구박을 받으면 도망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지. 하지만 말이다…"
노파가 순이를 똑바로 바라봅니다. 불빛에 비친 노파의 눈동자가 유난히 맑습니다.
"도망을 친다고 문제가 풀리느냐? 네가 이 산을 넘어 친정에 간다 치자. 그다음은 어쩔 거냐? 친정 아버지는 어떡하고, 네 남편은 어떡하느냐?"
순이의 입이 열리지 않습니다.
"시어머니가 모질다고 했지. 하지만 그 모진 사람도 한때는 네처럼 젊은 며느리였을 게야. 그 사람도 시집살이를 했을 거고, 아마 지금의 너보다 더 힘들었을 수도 있어."
"할머니 말씀은… 참으라는 건가요?"
"아니여, 참으라는 게 아니라 방법을 바꿔보라는 거야."
노파가 불쪽으로 손을 뻗어 따뜻하게 쬡니다.
"불이라는 게 신기하지 않느냐. 이 불이 따뜻한 건 장작이 제 몸을 태우기 때문이여. 장작이 안 타면 불도 없어.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야. 네가 먼저 마음을 태우면, 상대방도 따뜻해지는 법이야."
순이가 고개를 갸웃합니다.
"제가 먼저요? 저는 이미 삼 년을 했는데요."
"삼 년 동안 살림을 했지, 마음을 준 건 아니잖아."
순이의 눈이 커집니다.
"살림을 잘하는 것과 마음을 주는 건 다르단다. 네 시어머니가 모질게 구는 건, 혹시 네 마음을 시험하는 건 아닐까?"
순이는 대답하지 못합니다. 노파의 말이 가슴에 묵직하게 내려앉습니다. 삼 년 동안 순이는 시어머니의 구박에 맞서기 위해 살림을 완벽하게 하려고만 했습니다. 밥을 잘 짓고, 빨래를 깨끗이 하고, 장독대를 말끔히 닦고. 하지만 정작 시어머니에게 진심으로 다가간 적은 없었습니다. 시어머니도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랬구나… 나는 살림은 했지만 마음은 주지 않았구나.'
노파가 순이의 손을 잡습니다.
"아까 보니 네 시어머니가 기침을 한다고 했지?"
"네, 겨울마다 기침이 심하세요.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시는데, 약을 써봐도 잘 낫지 않으셔서…"
노파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건 흉중(胸中)에 한기가 쌓인 게야. 오래된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이 된 거지. 약으로만은 안 낫는단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노파는 대답 대신 눈을 감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릅니다. 불꽃이 타닥 소리를 내며 튑니다.
순이는 노파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주름진 얼굴에 불빛이 따뜻하게 내려앉아 있습니다. 꼭 돌아가신 어머니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할머니…"
"응?"
"할머니는 어디 사세요? 이 눈보라가 그치면 제가 할머니 집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노파가 빙긋 웃습니다.
"내 집은 멀지 않단다. 걱정 마라."
"하지만 이 산중에 혼자 어떻게…"
"나는 괜찮아. 걱정 말고 너는 네 걱정이나 해라."
순이는 남은 주먹밥 한 덩이를 노파에게 건넵니다.
"할머니, 이거 드세요. 저는 괜찮아요."
"네가 먹어야지."
"아녜요, 저는 젊으니까요. 할머니가 드세요."
노파가 주먹밥을 받아들고 한참 바라봅니다.
"고맙다, 아가. 정말 고마워."
노파가 주먹밥을 한 입 베어 먹습니다. 순이는 불 앞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습니다.
바깥의 눈보라가 조금씩 잦아드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이 방 안의 온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순이는 노파의 옆에 기대어 스르르 눈이 감깁니다. 삼 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 곁에 있다는 안도감 속에서 잠이 듭니다.
노파가 잠든 순이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주름진 손으로 순이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깁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순이는 꿈을 꿉니다. 꿈속에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타납니다. 어머니가 웃고 있습니다. "순아, 네가 한 일은 헛되지 않을 거란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노파의 목소리와 겹칩니다.
밤이 깊어갑니다. 불씨가 약해지면 노파가 나뭇가지를 넣어 불을 살립니다. 마치 순이의 꺼져가던 마음에 불을 지피듯.
※ 5: 날이 밝고 노파가 보자기 하나를 건네며 사라짐
새소리가 들립니다.
순이가 눈을 뜹니다. 방 안에 희뿌연 빛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아궁이의 불은 꺼졌지만 잔열이 남아 방바닥이 아직 미지근합니다.
"할머니?"
옆을 돌아봅니다. 노파가 없습니다.
순이는 벌떡 일어납니다. 방 안을 둘러보고,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갑니다.
눈이 그쳤습니다. 세상이 온통 하얗습니다. 어젯밤의 눈보라가 거짓말처럼, 하늘은 맑고 해가 산 너머에서 붉게 떠오르고 있습니다. 나무마다 눈꽃이 피어 있고, 산 전체가 하얀 솜을 뒤집어쓴 듯합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할머니! 할머니!"
순이는 폐가 주변을 뛰어다니며 부릅니다. 발자국을 찾으려 하지만, 밤새 내린 눈이 모든 흔적을 덮어버렸습니다. 아니, 이상합니다. 순이가 어젯밤 들어왔을 때의 발자국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이 폐가에 온 적이 없는 것처럼.
'할머니가… 어디로 가신 거지?'
순이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때 순이의 눈에 뭔가 보입니다. 어젯밤 노파가 누웠던 자리에, 보자기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남색 보자기. 낡았지만 깨끗한 무명 보자기입니다.
"이건… 어젯밤에는 없었는데."
순이는 무릎을 꿇고 보자기를 풀어봅니다. 안에 두 가지 물건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종이에 싼 약봉지. 누렇게 바랜 한지 위에 먹으로 글씨가 적혀 있습니다.
'흉중한기방(胸中寒氣方).'
가슴 속 한기를 다스리는 처방이라는 뜻입니다. 약봉지를 열어보니 말린 약재가 들어 있습니다. 순이는 약재의 이름을 모르지만, 코를 가까이 대니 은은하고 따뜻한 향이 납니다.
다른 하나는 접힌 편지 한 장입니다. 순이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펼칩니다.
글씨가 단정합니다. 한글로 쓰여 있습니다.
'아가에게.
이 약을 아침저녁으로 달여 네 시어머니께 올려라.
약은 몸의 한기를 녹이지만, 진짜 한기를 녹이는 건 네 마음이란다.
약을 달이되 원망 없이 달이고, 올리되 시키지 않아도 올려라.
석 달을 그리하면 네 시어머니의 기침이 멈출 것이고,
기침이 멈추면 마음도 열릴 것이니라.
도망은 언제든 할 수 있다. 하지만 돌아가는 건 지금이 아니면 영영 못 한단다.
눈보라 속에서 늙은이를 업어준 네 마음이라면
네 시어머니의 마음도 업어줄 수 있을 게야.
만복(萬福)은 먼 데 있지 않다. 네 두 손 안에 있단다.'
순이는 편지를 다 읽고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이 할머니가 대체 누구시지.'
평범한 노파가 아닙니다. 이 약재를 어디서 구한 것이며, 시어머니의 병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순이는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려봅니다. 주름진 얼굴, 맑은 눈동자, 순이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던 따뜻한 손길.
'꼭… 돌아가신 어머니 같았어.'
순이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흐릅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어젯밤과 다릅니다. 뜨겁고, 맑습니다.
순이는 편지를 가슴에 품고 일어섭니다. 보자기를 다시 싸서 치마폭에 넣습니다. 그리고 폐가 문 앞에 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시댁이 있는 마을 쪽입니다. 하얀 눈밭 너머로 기와집 지붕들이 보입니다.
'돌아가자.'
순이는 산을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어젯밤 올라올 때와는 다른 발걸음입니다. 가볍지는 않지만, 방향이 확실합니다.
'어머니… 아니, 할머니. 고맙습니다. 한 번만 더 해볼게요. 이번에는 다르게.'
눈밭을 걷는 순이의 뒤로, 아침 햇살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순이를 따뜻하게 밀어주는 듯합니다.
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순이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합니다.
'만약 시어머니가 내가 도망친 걸 아셨으면 어떡하지. 아니, 알았을 거야. 아침밥이 안 올라갔을 테니.'
하지만 순이는 발을 멈추지 않습니다. 대문 앞에 섭니다. 큰 기와집 대문은 닫혀 있습니다.
순이는 대문을 밉니다. 삐걱.
마당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부엌 쪽에서 인기척이 납니다.
※ 6: 편지를 읽고 결심한 순이가 시댁으로 돌아감
부엌에서 나온 것은 남편 김도령입니다.
김도령의 얼굴이 새하얗습니다. 눈이 퉁퉁 부어 있고, 도포 자락에 눈이 잔뜩 묻어 있습니다. 밤새 밖에 나갔다 들어온 모습입니다.
김도령이 순이를 봅니다. 순이도 김도령을 봅니다. 잠시 정적이 흐릅니다.
"… 순이?"
"서방님."
김도령이 달려옵니다. 순이의 어깨를 잡습니다. 손이 떨리고 있습니다.
"어디 갔었어. 대체 어디 갔었냐고."
"저는…"
"새벽에 일어나니 네가 없더라. 부엌에도 없고, 장독대에도 없고, 마을 어디에도 없더라. 이 눈보라에 어딜 간 거야."
김도령의 목소리가 떨립니다. 화가 난 것인지, 걱정인 것인지, 아마 둘 다일 것입니다.
순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입니다.
"어머님은요?"
"어머니가… 아침에 네가 없다는 걸 아시고 기침이 더 심해지셨어. 지금 안방에 누워 계셔."
순이의 가슴이 철렁합니다.
'내 때문에 어머님 병이 더 심해진 건가.'
순이는 치마폭에 손을 넣어 보자기를 만져봅니다. 약봉지가 손에 잡힙니다.
"서방님, 저한테 할 말이 많으시겠지만, 그건 나중에 해주세요. 지금은 어머님께 먼저 가볼게요."
"뭐?"
김도령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습니다. 도망쳐 나간 며느리가 돌아오자마자 시어머니에게 간다니.
순이는 부엌으로 들어갑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솥에 물을 올립니다. 보자기에서 약봉지를 꺼내 약재를 솥에 넣습니다.
약재가 물에 잠기자 은은한 향이 부엌에 퍼집니다. 따뜻하고 깊은 향. 순이는 그 향을 맡으며 노파의 편지를 떠올립니다.
'약을 달이되 원망 없이 달이고, 올리되 시키지 않아도 올려라.'
순이는 약이 끓는 동안 아침상을 준비합니다.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나물을 무칩니다. 참기름이 없으니 들기름을 넣습니다. 간장 종지에 파를 송송 썰어 넣고, 김치를 가지런히 담습니다.
약이 다 달여졌습니다. 뜨거운 약물을 사발에 따릅니다. 진한 갈색 약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옵니다.
순이는 아침상을 들고, 약사발을 그 위에 올려, 안방으로 향합니다.
안방 문 앞에 섭니다. 심호흡을 합니다. 문을 엽니다.
시어머니 박 씨가 이불을 덮고 누워 있습니다. 기침 소리가 연신 터져 나옵니다. 박 씨가 문 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다가 순이를 보고 눈이 커집니다.
"네… 네년이?"
"어머님, 아침 가져왔습니다."
순이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상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약사발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시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이게 뭐냐."
"약이에요, 어머님. 흉중의 한기를 다스리는 약이라 합니다. 어머님 기침에 좋을 거예요."
박 씨가 순이를 노려봅니다.
"밤새 어딜 갔다 온 년이 갑자기 약을 가져와? 독이라도 탔느냐."
순이의 손이 떨립니다. 하지만 약사발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독은 아닙니다, 어머님. 제가 먼저 마셔볼까요?"
순이는 약사발에 입을 대고 한 모금 마십니다. 쓰지만 뒷맛이 달큼합니다. 그리고 다시 시어머니에게 내밉니다.
박 씨가 순이를 한참 바라봅니다. 순이의 얼굴에 어젯밤 눈보라를 맞은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볼이 얼어서 벌겋게 부풀어 있고, 입술이 갈라졌고, 손등에는 동상 자국이 있습니다.
"… 이년이, 그 꼴이 뭐냐. 얼굴이 왜 그래."
"괜찮습니다, 어머님."
"괜찮긴 뭐가 괜찮아. 밤새 눈밭에서 굴렀느냐."
순이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입니다. 박 씨가 못마땅한 듯 입을 다물었다가, 기침을 한 번 하고 약사발을 받아듭니다.
후후 불어 한 모금 마십니다. 눈을 가늘게 뜹니다.
"… 이게 무슨 약이냐. 어디서 구한 거여."
"산에서 만난 분이 주셨어요."
"산에서? 이 겨울에 산에서 누굴 만나?"
"할머니 한 분을 만났어요. 그분이 이 약을 주시며 어머님께 달여드리라 하셨습니다."
박 씨가 코웃음을 칩니다.
"허, 미친 소리를. 산에서 만난 할머니가 약을 줘? 그런 말을 누가 믿느냐."
하지만 약을 더 마십니다. 절반을 비우고 나서야 사발을 내려놓습니다.
"… 맛은 괜찮구나."
순이는 소리 없이 미소를 짓습니다. 아주 작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미소.
"어머님, 아침 드세요. 오늘은 들기름으로 나물을 무쳤어요."
박 씨는 뭐라 핀잔을 주려다 기침을 합니다. 순이가 등을 쓸어드립니다. 박 씨가 순이의 손을 뿌리치려다 멈칫합니다. 순이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갑습니다.
"이년아, 네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
"추워서 그래요. 금방 따뜻해질 거예요."
박 씨가 입을 열었다 닫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다 삼킨 듯합니다.
순이는 시어머니가 밥을 드실 때까지 옆에 앉아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밥을 다 먹고 나서야 물러나며 상을 들고 나옵니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데 김도령이 와서 섭니다.
"순이야."
"네."
"아까 그 약은 대체 어디서…"
"서방님, 제가 어젯밤에 산에서 쓰러진 할머니 한 분을 만났어요. 그 할머니를 업고 빈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할머니는 안 계시고 이 약과 편지만 남겨놓고 가셨어요."
순이는 편지를 꺼내 김도령에게 보여줍니다. 김도령이 편지를 읽습니다. 읽고 나서 고개를 갸웃합니다.
"이 할머니가 누군지 모르겠다만… 어머니 병을 어떻게 알았을까."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약을 석 달만 달여보고 싶어요."
김도령이 순이를 바라봅니다.
"순이야, 나한테 할 말이 있지 않아?"
순이가 입술을 깨뭅니다.
"서방님, 저 어젯밤에 도망치려 했어요. 더 못 견디겠어서."
김도령의 얼굴이 굳습니다.
"하지만 돌아왔어요. 그 할머니 말씀을 듣고, 다시 한번 해보려고요. 서방님도 도와주실 거지요?"
김도령이 한참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 내가 그동안 너한테 너무 무심했구나."
순이의 눈에 물기가 맺힙니다. 삼 년 만에 남편에게서 처음 듣는 말입니다.
※ 7: 약 덕에 시어머니의 병이 낫기 시작
그날부터 순이의 하루가 달라집니다.
새벽에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때는 것은 같지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약을 달이는 것입니다. 약재를 솥에 넣고 물을 붓고 은근한 불로 한 시진을 끓입니다. 부엌에 퍼지는 은은한 약 향기가 집 안 가득 퍼집니다.
약을 사발에 따라 안방으로 갑니다.
"어머님, 약 가져왔습니다."
"또 그 약이냐. 효험이 있는지도 모르겠구먼."
"그래도 드셔보세요, 어머님."
박 씨는 투덜거리면서도 약을 받아 마십니다. 순이는 시어머니가 약을 마시는 동안 방을 쓸고, 이불을 정돈하고, 화로에 숯을 넣어줍니다.
이렇게 열흘이 지납니다.
열흘째 되는 날 아침. 순이가 약을 가져가자 박 씨가 기침을 하다 말고 순이를 흘깁니다.
"이년아."
"네, 어머님."
"약에 뭘 넣었길래 이상하게 밤에 기침이 좀 덜하더라."
순이의 얼굴이 환해집니다.
"정말요, 어머님?"
"그렇다고 낫겠냐만은, 좀 덜한 건 맞아."
"다행이에요. 계속 달여드릴게요."
"마음대로 해라."
입으로는 퉁명스럽지만, 박 씨가 약사발을 비우는 속도가 전보다 빨라졌습니다.
스무 날이 지납니다.
순이는 약을 달이는 것 외에도 한 가지를 더 합니다. 시어머니가 잠자리에 들기 전, 대야에 뜨거운 물을 떠와 시어머니의 발을 씻겨드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어머님 발이 차가우시잖아요. 발이 따뜻해야 기침도 나아진대요."
"누가 그런 소릴 했어."
"산에서 만난 할머니가요."
"또 그 할머니 타령이냐. 귀신한테 홀린 게 아니여?"
박 씨가 발을 빼려 하지만, 순이가 조심스럽게 잡습니다.
"잠깐만요, 어머님. 금방이에요."
순이는 시어머니의 발을 따뜻한 물에 담그고 부드럽게 주무릅니다. 박 씨의 발은 갈라지고 굳은살이 박여 있습니다. 평생을 안살림하며 서서 일한 발입니다.
'이 발이… 시어머니의 삼십 년이구나.'
순이는 시어머니의 발을 정성껏 씻깁니다. 발가락 사이사이를 닦고, 갈라진 뒤꿈치에 들기름을 발라줍니다. 박 씨가 처음에는 불편해하더니, 이내 눈을 감고 가만히 있습니다.
"… 따뜻하구나."
작은 목소리입니다. 순이는 대답 대신 더 정성을 들입니다.
한 달이 지납니다.
박 씨의 기침이 확연히 줄었습니다. 밤에 기침 때문에 깨는 일이 없어졌고, 아침에 일어나면 가슴이 덜 답답하다고 합니다. 얼굴에도 혈색이 돕니다.
그리고 변화는 박 씨의 몸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아침, 순이가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는데 박 씨가 부엌으로 들어옵니다.
"어머님, 왜 나오셨어요. 방에 계시지."
"내가 부엌에 오면 안 되느냐."
"아니, 그게 아니라 추운데…"
박 씨가 순이 옆에 앉습니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순이가 밥 짓는 것을 바라봅니다. 순이는 어색하지만 평소대로 밥을 짓습니다.
한참 뒤 박 씨가 말합니다.
"순이야."
순이가 깜짝 놀랍니다. 시어머니가 '순이야'라고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입니다. 늘 '이년아', '너', 아니면 '며느리'라고만 불렀습니다.
"네, 어머님."
"네 나물 솜씨가 참 좋더라."
"네?"
"어제 저녁 나물 말이여. 간이 딱 맞더라."
순이는 멍하니 시어머니를 바라봅니다. 칭찬입니다. 시어머니에게서 칭찬을 들은 것이 삼 년 만에 처음입니다. 아니, 처음입니다.
"어머님… 고맙습니다."
"고마울 거 뭐가 있어. 잘한 건 잘했다고 해주는 게 맞지."
박 씨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립니다. 하지만 순이는 봤습니다. 시어머니의 입가에 아주 미세한, 정말 자세히 봐야 보이는 미소가 스친 것을.
두 달이 지납니다.
약재가 거의 바닥을 보입니다. 순이는 걱정이 됩니다. 이 약재가 떨어지면 어디서 구하지.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박 씨의 기침이 거의 멈춘 것입니다.
삼 년 동안 겨울마다 시어머니를 괴롭히던 기침이, 두 달 만에 씻은 듯 나은 것입니다.
"어머님, 오늘은 기침을 한 번도 안 하셨어요."
"그러게. 이상하다. 올겨울은 기침이 없네."
순이는 속으로 노파에게 감사합니다.
'할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약이 듣고 있어요.'
하지만 순이는 알고 있습니다. 약만으로 나은 것이 아니라는 걸. 매일 약을 달이고, 발을 씻기고, 진심으로 안부를 묻고, 시어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얼음이 녹기 시작한 것입니다.
박 씨가 변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는 순이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줍니다.
"내가 시집왔을 때 말이여, 내 시어머니가 얼마나 무서운 분이셨는지 아느냐."
순이가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어머님도 시집살이를 하셨어요?"
"당연하지. 나도 너처럼 울면서 살았어. 그런데 참고 참고 또 참으니까, 나중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내 손을 잡고 그러시더라. '네가 참아줘서 고맙다'고."
박 씨의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그때 알았어. 참는 게 지는 게 아니라, 이기는 거라는 걸."
박 씨가 순이를 바라봅니다.
"근데 나는 너한테 참으라고만 했지,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했구나."
순이의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어머님…"
"네가 그날 밤 도망친 거 알아."
순이의 몸이 굳습니다.
"아침에 네가 없는 걸 보고 바로 알았어. '아, 이 며느리도 결국 나갔구나.' 그래서 기침이 더 심해진 거여.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마음이 아파서."
박 씨가 기침을 한 번 합니다. 하지만 이번 기침은 병 때문이 아닙니다.
"근데 네가 돌아왔잖아. 돌아와서 약을 달여왔잖아. 그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순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사실 나는… 첫째 며느리가 도망간 뒤로 마음을 닫았어. 며느리한테 정을 주면 또 배신당할까 봐. 그래서 일부러 모질게 군 거여. 미안하다, 순이야."
순이는 시어머니의 손을 잡습니다. 이번에는 박 씨가 손을 뿌리치지 않습니다.
"어머님, 저야말로 죄송해요. 도망치려 했던 거 용서해 주세요."
"용서는 무슨. 도망치고 싶을 만했지. 내가 너무 했어."
두 여인이 마주 잡은 손 위로 눈물이 떨어집니다. 안방에 화로 불빛이 따뜻하게 퍼져 있습니다.
※ 8: 가문이 화목해지고 아들이 태어남
봄이 옵니다.
김 진사 댁 마당에 매화가 핍니다. 올해 봄은 유난히 따뜻합니다. 아니, 집안이 따뜻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부엌에서 밥 짓는 소리가 납니다. 그런데 부엌에 서 있는 사람이 둘입니다.
"순이야, 콩나물은 이렇게 머리를 떼고 삶아야 해."
"아, 그래요? 저는 늘 그냥 삶았는데."
"그러니까 식감이 안 좋았지. 이리 와, 내가 알려줄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나란히 부엌에 서서 밥을 짓고 있습니다. 사랑채에서 김 진사가 고개를 내밀고 보다가 혼잣말을 합니다.
"허, 세상에 이런 날이 오는구나."
김도령도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과거 공부만 하며 안채 일에 무관심한 남편이 아닙니다. 아내가 무거운 것을 들면 달려와 받아들고,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다리를 놓습니다.
어느 날 아침, 시어머니 박 씨가 순이를 부릅니다.
"순이야, 여기 앉아봐라."
"네, 어머님."
박 씨가 오래된 나무함을 하나 꺼냅니다. 뚜껑을 열자 안에 비녀 하나가 들어 있습니다. 은비녀입니다. 세월의 때가 묻었지만 품격이 있는 비녀입니다.
"이건 내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나한테 주신 거여. '참아준 네가 이 집의 진짜 안사람이다' 하시면서."
박 씨가 비녀를 순이에게 내밉니다.
"이제 이게 네 거다."
순이가 두 손으로 받습니다.
"어머님, 이건 너무…"
"됐어, 받아. 네가 이 집의 안사람이야. 나는 이제 인정해."
순이는 비녀를 가슴에 품고 시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립니다.
그해 가을, 순이에게 기쁜 소식이 찾아옵니다. 잉태를 한 것입니다. 소식을 들은 박 씨가 안방에서 뛰어나옵니다.
"뭐라고? 정말이냐?"
"네, 어머님."
박 씨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집니다. 이번에는 기쁨의 눈물입니다.
"아이고, 아이고! 이 집에 복이 들어온다, 복이!"
박 씨가 순이를 끌어안습니다. 삼 년 반 만에 시어머니에게서 받는 첫 번째 포옹입니다.
그다음 해 봄, 순이가 옥동자를 낳습니다. 온 마을이 축하를 보냅니다. 김 진사 댁에 대를 이을 손자가 태어났다며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 김도령이 과거에 급제합니다. 시어머니의 구박에 시달리던 시절에는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던 남편이, 집안이 화목해지자 마음 놓고 학문에 매진한 결과입니다.
"서방님, 축하드려요."
"순이야, 이건 다 네 덕분이야."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김 진사 댁이 언제부터 저렇게 좋아졌대?"
"글쎄, 며느리가 뭘 했는지 모르겠는데, 겨울에 시어머니 기침이 싹 나은 뒤부터 그렇다더라."
이웃집 갑순이가 순이를 찾아옵니다.
"순이야, 너 대체 무슨 약을 구한 거야? 시어머님이 완전히 딴 사람이 됐잖아."
순이는 빙긋 웃습니다.
"약이 좋은 게 아니라, 마음이 좋았던 거야."
"마음?"
"응. 내가 먼저 마음을 열었더니, 어머님도 마음을 열어주시더라고."
갑순이가 고개를 갸웃하지만, 순이는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해 겨울, 순이는 아기를 업고 뒷산에 올라갑니다. 일 년 전 눈보라 속에서 헤매던 그 산길입니다. 폐가를 찾아가 봅니다.
초가집이 여전히 서 있습니다. 하지만 뭔가 다릅니다. 지붕 위에 까치가 앉아 울고 있고, 마당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핀 흔적이 있습니다.
순이는 폐가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읍니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할머니 말씀대로 했더니 정말 복이 왔어요. 시어머님 병도 나으시고, 아들도 태어나고, 서방님도 급제했어요."
바람이 붑니다. 부드러운 바람. 마치 누군가 순이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듯한 바람입니다.
"할머니가 누구였는지, 저는 아직도 몰라요. 하지만 할머니가 아니었으면 저는 그날 밤 이 산을 넘어 영영 돌아오지 않았을 거예요."
등에 업힌 아기가 옹알이를 합니다. 순이가 아기의 볼을 어루만집니다.
"이 아이 이름을 만복이라고 지었어요. 만 가지 복. 할머니가 저한테 주신 그 복을 이 아이가 이어받으라고요."
산 위에서 햇살이 내려옵니다. 겨울 햇살이지만 따뜻합니다.
마을로 내려오는 길, 이웃집 할머니가 순이를 부릅니다.
"순이 아가, 잠깐. 네가 작년에 산에서 만난 할머니 이야기 있잖아. 나도 들었는데."
"네?"
"우리 마을에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어. 눈보라 치는 밤에 산길에서 남을 도우면, 산신령 할머니가 복을 내린다는 이야기. 혹시 네가 만난 할머니가…"
할머니가 말끝을 흐립니다. 순이는 미소만 짓습니다.
"글쎄요. 누구셨든 제 은인이에요."
집에 돌아오니 시어머니가 마당에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딜 갔다 이제 오느냐. 밖이 춥잖아. 어서 들어와."
"네, 어머님."
순이가 대문을 들어섭니다. 시어머니가 아기를 받아 안습니다.
"아이고, 우리 만복이. 할머니가 안아줄게. 추웠지?"
따뜻한 안방에 들어갑니다. 화로에 불이 피워져 있고, 밥상이 차려져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차린 밥상입니다.
"어머님이 밥을 차리셨어요?"
"며느리가 밖에 나갔는데 시어미가 밥을 안 차리면 되겠느냐. 어서 앉아 먹어라."
순이가 상 앞에 앉습니다. 밥, 국, 나물, 김치. 그리고 참기름이 올라간 시금치나물.
"어머님, 참기름이…"
"아까 장에서 사왔어. 네가 참기름 타령을 하도 해서."
순이의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어머님, 맛있겠어요."
"빨리 먹어. 식기 전에."
밥상 위로 화로의 온기가 퍼집니다. 안방에 시어머니와 며느리와 아기가 앉아 있습니다. 밖에서는 겨울바람이 불지만, 이 방 안은 따뜻합니다.
만복이 깃든 집입니다.
눈보라 속에서 남을 먼저 생각한 마음 하나가, 얼어붙은 시어머니의 가슴을 녹이고, 무심했던 남편의 눈을 뜨게 하고, 한 집안에 대를 이을 아들과 과거 급제의 영광까지 안겨주었습니다.
만복은 먼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두 손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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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 어떠셨습니까.
눈보라 속에서 낯선 할머니를 업어준 며느리 순이.
그 작은 마음 하나가 얼어붙은 시어머니의 가슴을 녹이고,
한 집안에 만 가지 복을 불러왔습니다.
만복은 먼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두 손 안에 있습니다.
양반야담, 오늘도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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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네일 이미지 프롬프트 (영어, 16:9, no text)
A young Korean woman in traditional Joseon-era hanbok carrying an elderly grandmother on her back through a heavy snowstorm on a mountain path at night, warm golden lantern light glowing faintly through the blizzard, snow-covered pine trees bending under the weight of snow, the young woman's face showing determination and compassion, the grandmother wrapped in a worn blanket with eyes closed, footprints disappearing in deep snow behind them, dramatic contrast between the cold blue-white snow and the warm amber glow emanating from a distant abandoned thatched cottage barely visible through the storm, cinematic composition, painterly Korean traditional art style mixed with realistic detail, atmospheric perspective, emotional and dramatic mood, 16:9 aspect ratio, no t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