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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찾아온 여인의 정체 , 인연이 삶을 구한 따뜻한 밤 『어우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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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 멘트 (400자 내외)
"달빛조차 숨어버린 깊은 산속, 인적 없는 외딴집에서 홀로 글을 읽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것도 산짐승이나 도적이 아니라, 비단결같이 고운 여인이라면 말입니다. 여기, 그 치명적인 유혹인지 모를 문을 열어준 한 가난한 선비가 있습니다. 헌데 이 여인, 어딘가 수상합니다. 손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밤새 나누던 정담이 새벽닭만 울면 연기처럼 사라지니 말입니다. 선비가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가 덮쳤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 기묘한 인연이 선비의 목숨을 구하는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차가운 귀신의 손이 사람의 생명을 살려낸 따뜻하고도 기이한 하룻밤 이야기! 《어우야담》 속에 숨겨진 보석 같은 사연을 지금 공개합니다."
디스크립션 (300자 내외)
조선 광해군 시절, 유몽인이 집필한 야담집 《어우야담》에는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사람과 영혼 사이의 애틋한 교감을 다룬 이야기를 각색해 드립니다. 과거 급제를 위해 입산수도하던 가난한 선비 박 씨. 지독한 추위와 외로움 속에 떨던 그에게 찾아온 낯선 여인. 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그녀를 내치지 않았던 선비의 따뜻한 마음이, 훗날 닥쳐올 재앙 앞에서 어떤 결실을 맺게 될까요? 무서운 귀신 이야기가 아닌, 마음을 어루만지는 그리움과 인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인적 드문 강원도 산골 암자,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 속에 공부하는 선비 박 씨에게 찾아온 의문의 인기척
자, 옛날이야기 보따리를 한번 풀어봅시다. 때는 조선 중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장소는 저기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첩첩산중입니다. 이곳에 박 씨 성을 가진 젊은 선비 하나가 살고 있었는데, 집안이 어찌나 찢어지게 가난한지 한양 도성에서는 방 한 칸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하여, 선비는 과거 공부를 핑계 삼아 다 쓰러져가는 낡은 암자 하나를 빌려 머물고 있었지요. 낮에도 멧돼지가 마당을 제집처럼 드나들고 밤이면 부엉이 우는 소리가 귀신 곡소리처럼 들려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그런 외진 곳이었습니다.
계절은 바야흐로 동짓달 기나긴 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문풍지를 북처럼 두들겨 대는 혹독한 겨울밤이었습니다. 방 안 꼴을 좀 볼까요? 아랫목이라 해봤자 군불을 땐 지 오래라 차가운 냉골이요, 윗목에는 마시다 남은 숭늉 그릇이 꽁꽁 얼어터질 지경입니다. 벼루에 먹을 갈려 해도 물이 얼어 먹이 갈리지 않으니, 선비는 언 손을 입김으로 '호오, 호오' 불어가며 겨우 붓을 잡고 있었습니다. 솜이 다 빠져나간 누더기 이불을 어깨에 뒤집어쓰고, 희미하게 가물거리는 호롱불 아래서 책을 읽고 있는 선비의 모습, 참으로 처량하기 그지없습니다. "자왈,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공자 맹자를 읊조리지만, 사흘 굶은 배가 등가죽에 딱 달라붙어 꼬르륵 소리가 천둥처럼 울리는데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있겠습니까.
"에구,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고생인가. 고향에 계신 홀어머니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주무시는지..." 선비가 붓을 놓으며 땅이 꺼져라 긴 한숨을 내쉬는 찰나였습니다. 갑자기 사립문 밖에서 '바스락,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처음에는 짐승 소리인가 싶어 귀를 쫑긋 세웠으나, 이내 '사각, 사각' 눈 밟는 소리가 방문 앞에서 뚝 멈추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소리. '똑, 똑, 똑.'
선비는 덜컥 겁이 나서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습니다. 이 깊은 산중 삼경(밤 11시~1시)에 찾아올 사람이 대체 누가 있단 말입니까. 호랑이가 사람 흉내를 낸다는 창귀 전설도 생각나고, 도깨비 이야기도 떠올라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선비는 침을 꿀꺽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게... 게 누구시오? 이 깊은 밤에 뉘시기에 기척도 없이 남의 처소를 엿보는 게요?"
그러자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참으로 기이했습니다. 꾀꼬리처럼 맑고 고운 여인의 목소리였는데, 그 톤이 낮고 서늘하여 마치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소리 같았습니다. "지나가는 과객이옵니다. 눈보라 치는 밤 길을 잃어 헤매다 불빛을 보고 찾아왔습니다. 부디 문을 열어 하룻밤만 몸을 녹이고 가게 해주십시오."
선비는 망설였습니다. 남녀가 유별한데 외간 여인을 밤중에 들이는 것도 법도에 어긋나거니와, 이 험한 산중에 여인 혼자 다닌다는 게 영 미심쩍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밖에서 달달 떨고 있을 사람을 매정하게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선비는 '에라, 모르겠다. 사람이면 살려야 하고, 귀신이면 내 팔자려니' 하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습니다. '끼이익-' 문이 열리자 찬 바람과 함께 하얀 눈보라가 방 안으로 훅 끼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하얀 쓰개치마를 쓰고 홑겹 저고리만 걸친 묘령의 여인이 파리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핏기 없는 푸른 입술, 깊은 우물처럼 슬픈 눈동자... 그 모습이 어찌나 처연하고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지, 선비는 순간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 문을 열고 들어온 묘령의 여인, 그녀와 나누는 술잔과 기묘한 대화
선비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몸을 비켜주며 여인을 방 안으로 들였습니다. "누추한 곳이지만 어서 들어오시지요. 불을 때지 못해 냉골입니다만, 밖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여인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는, 소리 없이 방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습니다. 헌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요. 분명 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여인의 하얀 옷자락에는 눈송이 하나 묻어있지 않았고, 옷감이 젖은 기색도 없이 보송보송한 것이었습니다. 마치 비를 피하는 요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말입니다. 선비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해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여인이 자리를 잡고 앉자, 퀴퀴하던 방 안에는 묘한 향기가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절에서 피우는 향 냄새 같기도 하고, 깊은 산속 국화꽃 냄새 같기도 한 은은하고 서늘한 향기였습니다. 선비는 쑥스러워 헛기침만 해댔습니다. "어디 사는 뉘신데 이 밤중에 홀로 산길을 가신단 말이오?" 선비가 짐짓 점잖은 척 물으니, 여인이 나지막하게 대답했습니다. "소녀는 산 아래 마을 사람인데, 친정에 다녀오다 길을 잃었습니다. 선비님 덕분에 동사할 뻔한 위기를 넘겼으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요."
말을 마친 여인이 품속에서 작은 비단 주머니를 꺼내더니, 그 안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물건들을 주섬주섬 꺼내놓았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떡과, 향긋한 술병이었습니다. "시장하실 텐데 요기나 하시지요." 선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저 작은 주머니에서 어찌 저런 따끈한 음식이 나온단 말입니까. 하지만 며칠 굶은 선비에게 눈앞의 떡은 옥황상제의 복숭아보다 귀해 보였습니다. 체면이고 뭐고 따질 겨를이 없었습니다. "허허, 참으로 귀한 음식이구려. 실례를 무릅쓰고..."
선비는 허겁지겁 떡을 입에 넣었습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맛은 평생 먹어본 중 으뜸이었습니다. 여인이 따라주는 술 한 잔을 들이켜니, 뜨끈한 기운이 퍼지며 선비의 언 몸이 노곤하게 풀렸습니다. 술기운이 오르니 두 사람은 밤이 깊도록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여인은 글을 배운 듯 학식이 풍부하여, 선비가 시 한 수를 읊으면 그에 화답하는 멋드러진 답시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선비는 감탄했습니다. "이 산골에서 이런 귀인을 만나다니. 부인은 어찌 이리 글재주가 뛰어나시오?" 여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저... 지아비가 살아생전 글 읽는 것을 어깨너머로 배웠을 뿐입니다." 아, 과부였구나. 선비는 안타까워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새벽이 가까워오고, 촛불이 가물거릴 때였습니다. 선비는 여인에게 술잔을 권하다가 무심결에 그녀의 손끝을 스치게 되었습니다. 순간 선비는 '헉' 하고 숨을 멈췄습니다. 사람의 살결이라면 으레 느껴져야 할 온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마치 한겨울 계곡의 얼음장을 만진 듯,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냉기가 손끝을 타고 전해져 왔기 때문입니다. 선비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여인은 당황하며 옷소매를 감췄습니다. "제가... 밖에서 너무 떨어서 아직 몸이 다 녹지 않았나 봅니다." 여인의 미소마저 서늘했습니다. 선비의 등골에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사람의 체온이 이토록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그때였습니다. 멀리서 "꼬끼오~" 하고 새벽닭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여인의 얼굴색이 흙빛으로 변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비님, 날이 밝아오니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여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급히 방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선비가 "이보시오, 부인! 아직 어두운데!" 하며 따라나갔지만, 사립문 밖에는 하얀 눈만 소복이 쌓여 있을 뿐, 여인의 발자국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선비는 멍하니 눈 덮인 산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습니다. "사람이... 아니었구나. 내가 귀신과 하룻밤을 보냈단 말인가." 하지만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홀로 남겨진 그녀의 뒷모습이 사무치게 외롭고 슬프게 느껴져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이었습니다.
※ 매일 밤 찾아오는 여인에 대한 의구심, 뒤를 밟아 정체를 확인하는 선비
날이 밝았지만, 선비 박 씨의 머릿속은 온통 지난밤의 그 여인 생각뿐이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책은 까만 건 글씨요 하얀 건 종이일 뿐,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요. '분명 사람의 온기가 아니었다. 헌데 어찌 그리 슬픈 눈을 하고 있었을까. 내 배고픔을 달래주려 그 귀한 음식을 가져다준 정성은 또 무엇이고...' 선비는 낮에도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창밖의 눈 덮인 산만 바라보았습니다. 어젯밤 그녀가 사라진 곳을 아무리 살펴봐도 발자국 하나 없으니, 꿈을 꾼 것인가 싶다가도 입가에 맴도는 술 향기는 분명 현실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다시 밤이 찾아왔습니다. 어둠이 산자락을 타고 내려와 암자를 집어삼킬 듯 캄캄해지자, 선비의 심장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두근거림이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삼경이 되자 어김없이 사립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습니다. "선비님, 주무시는지요. 소녀 또 왔습니다." 문을 열자, 어제보다 더 창백해진, 그러나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선비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며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어서 오시오. 내 오늘 밤은 오지 않으려나 기다리고 있었소."
그날 밤도 여인은 맛있는 음식과 술을 내놓았고, 두 사람은 밤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하지만 선비의 눈은 여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촛불이 일렁일 때마다 여인의 그림자가 벽에 비치는데, 이상하게도 그 그림자가 묵처럼 검지 않고 희미한 연기처럼 투명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가끔 여인이 웃을 때면, 방 안의 공기가 서늘해지며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선비는 확신했습니다. '이 여인은... 이승의 사람이 아니다.'
새벽닭이 울기 직전, 여인은 또다시 황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날이 밝아오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인이 문을 나서자마자, 선비는 미리 준비해 둔 짚신을 꿰어 신을 새도 없이 버선발로 살금살금 뒤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여인은 산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구름 위를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나아갔습니다. 선비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기며, 거친 숨소리를 죽이고 그녀를 따라갔습니다. 숲은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여인의 하얀 소복이 희미한 광채를 내며 길을 안내하는 듯했습니다. 나뭇가지에 얼굴이 긁히고 발이 시려왔지만, 선비는 멈출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요. 여인이 멈춰 선 곳은 암자에서 십 리쯤 떨어진 으슥한 산비탈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주인 없는 오래된 무덤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여인은 그중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 봉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느 허름한 무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러고는 뒤를 한번 쓱 돌아보는가 싶더니, 연기처럼 스르르 무덤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비는 소스라치게 놀라 입을 틀어막고 나무 뒤에 주저앉았습니다. "아이고... 역시나... 무덤 귀신이었구나." 다리에 힘이 풀려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선비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쓸쓸하고 차가운 무덤 속에 홀로 누워있을 여인을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찡하니 아려오는 연민을 느꼈던 것입니다. 산 짐승도 피해 가는 흉흉한 묘지에서, 선비는 날이 밝을 때까지 멍하니 그 무덤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 여인의 정체를 알고도 모른 척, 오히려 더 따뜻하게 감싸주는 선비의 배려와 깊어가는 정
다음 날 밤, 선비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방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짐을 싸서 산을 내려갔겠지만, 박 씨는 달랐습니다. 가난과 고독이 뼈에 사무친 탓일까요, 아니면 귀신조차 감동시킨다는 선비의 꼿꼿한 기개 때문이었을까요. 그는 도망치는 대신 여인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비록 귀신일지라도 내게 해를 끼치기는커녕 주린 배를 채워주고 말벗이 되어주지 않았는가. 그 정성이 갸륵한데 어찌 내가 내칠 수 있단 말인가.'
밤이 깊어지자 어김없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선비님..." 여인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었습니다. 선비가 문을 열어주자, 여인은 쭈뼛거리며 방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문지방에 서서 머뭇거렸습니다. 아마도 어젯밤 선비가 자신을 미행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입니다. 선비는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무엇을 망설이시오? 밖이 춥소. 어서 들어와 아랫목에 앉으시오." 그 다정한 한마디에 여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방 안에 침묵이 흘렀습니다. 여인은 죄인처럼 고개만 숙이고 있었고, 선비는 그런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 선비가 불쑥 손을 뻗어 여인의 손을 덥썩 잡았습니다. 여인이 화들짝 놀라 손을 빼려 했지만, 선비는 더욱 꽉 쥐었습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 그것은 죽은 자의 냉기였습니다.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선비님... 제 손이... 차갑지 않으십니까? 무섭지... 않으십니까? 저는 사람이 아니옵니다..." 여인의 눈에서 그렁그렁하던 눈물이 툭 떨어져 선비의 손등을 적셨습니다. 눈물마저도 차가웠습니다.
선비는 고개를 저으며 여인의 손을 자신의 가슴팍으로 가져가 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 차가운 손을 녹여주며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차갑소. 마치 한겨울 눈보라처럼 차갑소. 허나... 당신이 내게 보여준 마음은 이 아랫목보다 더 뜨거웠소. 내가 귀신이면 어떻고 사람이면 어떻소. 이 깊은 산중에서 서로 의지하고 정을 나누었으면 그만이지. 나는 당신이 무섭지 않소. 오히려... 이리도 차가운 몸으로 그 추운 흙구덩이 속에 홀로 계셨을 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미어질 뿐이오."
선비의 말에 여인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으흐흑..." 귀신의 울음소리라기엔 너무나 서럽고 애달픈 통곡이었습니다. "소녀, 억울하게 죽어 구천을 떠돌다 선비님의 맑은 글 읽는 소리에 이끌려 이곳까지 왔습니다. 제 몰골이 흉하여 놀라실까 봐 본모습을 감추고 찾아왔으나, 선비님께서는 저를 내치지 않으시고 이리 따뜻하게 대해주시니... 죽어서도 받아보지 못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여인은 선비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습니다. 선비는 여인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습니다. 산 사람과 죽은 영혼이 서로를 껴안고 체온을 나누는 그 기묘한 밤. 방 안의 촛불은 흔들림 없이 타오르고, 선비의 가슴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여인의 차가운 몸으로, 그리고 얼어붙은 영혼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남녀의 정을 넘어선, 영혼과 영혼이 교감하는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살아생전 겪었던 기구한 사연들을 털어놓았고, 선비는 묵묵히 들어주며 함께 아파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추운 곳에 혼자 있지 마시오. 내가 여기 있는 동안은, 이 방이 당신의 집이오." 선비의 그 한마디는 여인에게 있어 천도재보다 더 큰 위로였을 것입니다. 새벽닭이 울어 여인이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 여인의 얼굴에는 핏기가 돌고 생기가 넘쳐흘렀습니다. 더 이상 흉측한 귀신의 기운이 아닌, 사랑받는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이었지요. 여인은 선비에게 큰 절을 올리고 사라졌습니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은 더 이상 쓸쓸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 여름 장마가 시작되고 폭우가 쏟아지는 밤, 다급하게 선비를 깨워 밖으로 끌어내는 여인
계절은 돌고 돌아, 어느덧 산천초목이 푸르른 녹음으로 우거지는 여름이 되었습니다. 선비와 여인의 기묘한 동거 아닌 동거도 벌써 반년이 훌쩍 넘었지요. 그동안 선비의 글공부는 일취월장하였고, 밤마다 찾아오는 여인과의 정분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허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요.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고, 평온하던 산골짜기에 거대한 재앙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때는 칠월 칠석이 지난 어느 날,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투두두둑, 콰아아앙!' 빗소리가 어찌나 거센지, 지붕 기와가 깨질 듯 요란했고, 계곡물 불어나는 소리가 마치 성난 흑룡이 울부짖는 것 같았습니다.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퍼붓는 비에, 선비가 머무는 낡은 암자는 금방이라도 흙탕물에 쓸려 떠내려갈 듯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선비는 방 안에 쭈그리고 앉아 제발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으나, 빗줄기는 굵어지면 굵어졌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당 앞까지 누런 흙탕물이 차오르고, 뒷산에서는 흙더미가 쓸려 내려오는 소리가 '우르르, 쿵' 하고 들려오니, 선비의 마음은 조마조마하여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이러다 집이 무너지는 건 아닌가... 그나저나 이 빗속에 그 여인은 무사할까... 무덤에 물이라도 들면 어쩐다...' 제 코가 석 자인데도 선비는 저 산비탈 무덤 속에 있을 여인 걱정뿐이었습니다.
그날 밤 삼경 무렵이었습니다. 빗소리에 묻혀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갑자기 방문이 '쾅!' 하고 거칠게 열렸습니다. 선비가 깜짝 놀라 쳐다보니, 거기엔 그토록 기다리던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헌데 그 모습이 평소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늘 단정하고 고운 모습이었던 여인이, 머리는 산발을 하고 옷은 흙탕물에 젖어 엉망이 된 채, 마치 미친 사람처럼 헐떡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의 눈은 공포와 다급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평소의 차분함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불에 덴 사람처럼 팔딱거리고 있었지요.
"선비님! 어서 나오세요! 당장 나오셔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여인은 다짜고짜 방으로 뛰어들더니 선비의 팔을 잡아끌었습니다. 평소 얼음장 같던 여인의 손에서 그날따라 불덩이 같은 기이한 열기가 느껴졌습니다. 선비가 당황하여 "아니, 부인! 밖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어딜 가란 말이오? 나가는 게 더 위험하오!" 하며 버티자, 여인은 선비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이 집이 무너집니다! 산이 무너져 내린단 말입니다! 제발 제 말을 믿고 따르십시오! 어서요!"
여인의 기세가 어찌나 맹렬하고 처절한지, 선비는 엉겁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여인은 선비가 신발을 챙길 새도 주지 않고, 맨발인 선비를 질질 끌다시피 하여 빗속으로 내달렸습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거센 비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고, 발목까지 차오른 끈적한 흙탕물이 걸음을 방해했습니다. "이쪽입니다! 더 빨리! 더 빨리 뛰어야 합니다!" 여인은 선비의 손을 절대 놓지 않고, 미끄러운 진흙길을 헤치며 산 위쪽, 지반이 단단한 바위 언덕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뛰었습니다. 하늘에서는 번개가 '번쩍!' 하며 두 사람의 도주로를 비추고, 땅 밑에서는 '쿠르르, 쿵, 쿵' 하는 기괴한 진동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저승사자가 쫓아오는 발소리처럼, 선비의 등 뒤를 바짝 추격해오고 있었습니다.
※ 산사태로 무너진 암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선비와 여인의 마지막 작별
"허억, 허억... 부인, 내 숨이 차서 더는 못 가겠소..." 선비가 바위 언덕 꼭대기에 이르러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으려는 찰나였습니다. 여인이 선비를 와락 끌어안으며 바닥에 납작 엎드린 순간, 등 뒤에서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콰아아아앙! 우르르르 쾅!" 마치 거대한 산신령이 노하여 주먹으로 땅을 내리친 듯, 선비가 방금 전까지 머물던 암자 뒷산이 통째로 뜯겨져 내려앉은 것입니다. 집채만 한 바위와 아름드리나무들이 시커먼 흙더미와 뒤엉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더니, 순식간에 암자를 덮쳐버렸습니다.
선비는 눈앞에서 벌어진 믿기 힘든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낡은 암자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거대한 흙더미 속에 파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만약 여인이 1분이라도 늦게 왔더라면, 아니 선비가 고집을 피우며 방 안에 머물렀더라면, 지금쯤 저 차가운 진흙 구덩이 속에서 압사하여 고혼이 되었을 것입니다. 선비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습니다. "이... 이럴 수가... 천붕지괴(天崩地壞)로다. 내가... 내가 죽을 뻔했구나."
선비는 덜덜 떨리는 몸을 일으켜 옆에 있는 여인을 찾았습니다. "부인! 부인 덕분에 살았소! 내 생명의 은인이오!" 하며 여인의 손을 잡으려는데, 여인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데도 여인의 몸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마치 새벽안개처럼 투명하게 변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은 바위 위에 힘없이 주저앉아, 무너져 내린 집터를 바라보며 슬프고도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몸에서는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선비님...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여인의 목소리가 바람 소리에 섞여 희미하게, 그러나 또렷하게 들려왔습니다. "부인! 몸이 왜 이러시오? 어디 아픈 게요? 왜 이리 희미해지시오!" 선비가 울부짖으며 여인을 끌어안으려 했지만, 그의 손은 여인의 몸을 통과해 허공을 가를 뿐이었습니다. 여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소녀, 이제야 제 할 일을 마쳤습니다. 억울하게 죽어 차가운 땅속에서 떨며, 저를 알아봐 주고 따뜻하게 대해줄 이를 기다렸습니다. 선비님께서 지난겨울 베풀어주신 그 따뜻한 정과 체온 덕분에, 꽁꽁 얼어붙었던 제 영혼이 녹았습니다."
여인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땅에 닿기도 전에 빛이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습니다. "이제 소녀는 미련 없이 저승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비님의 목숨을 구함으로써, 제가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고 갑니다. 부디... 부디 살아서 큰 뜻을 이루시고, 만수무강하십시오." 여인의 몸이 점점 빛나는 가루가 되어 빗줄기 속으로, 하늘로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선비는 땅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가지 마시오! 이렇게 가는 법이 어디 있소! 내 아직 그대에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이름조차... 이름조차 묻지 못했는데!"
하지만 여인은 마지막으로 선비에게 깊은 절을 올린 뒤, 빗속으로, 어둠 속으로, 그리고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스르르 사라져 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거친 빗소리와, 무너진 산의 비릿한 흙냄새, 그리고 홀로 남은 선비의 처절한 울음소리뿐이었습니다. 그날 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는 두 사람의 이별을 슬퍼하여 흘리는 눈물과도 같았습니다.
※ 날이 밝은 뒤 무덤을 찾아가 위로하는 선비, 그리고 과거 급제의 후일담
비가 그치고 거짓말처럼 맑은 해가 떠올랐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산사태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선비가 필시 변을 당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혀를 찼습니다. "아이고, 그 젊은 선비가 아깝게 되었네. 시신이라도 수습해 줘야 할 텐데..." 괭이와 삽을 들고 산을 오른 마을 사람들은 눈을 의심했습니다. 암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흙더미만 쌓여 있는데, 그 위쪽 바위 언덕에 선비가 멀쩡하게, 아니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천운이 따랐어! 조상님이 도우셨구먼!" 하며 기뻐했지만, 선비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선비는 마을 사람들을 뒤로하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엉망이 된 산비탈을 올랐습니다. 흙더미에 쓸려 내려가 길이 없어졌지만, 선비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무덤이 있던 곳을 찾아갔습니다. 다행히 산사태는 기적적으로 그녀의 무덤 바로 옆을 비껴가, 봉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선비는 무덤 앞에 털썩 주저앉아, 잡풀을 뜯어내고 옷자락으로 비석 없는 상석을 정성스레 닦았습니다. "부인... 내 왔소. 어젯밤에는 경황이 없어 인사도 제대로 못했구려."
선비는 품속에서 주섬주섬 꺼낸 술 한 병을 무덤 앞에 따랐습니다. 살아생전 그녀가 가져다주었던 그 향기로운 신선의 술은 아니었지만, 선비의 피눈물이 섞인 세상에서 가장 진한 술이었습니다. "내 약속하리다. 내 평생 당신을 잊지 않겠소. 당신이 그 차가운 손으로 나를 살려주었으니, 내 남은 목숨은 당신이 준 것이나 다름없소. 내 반드시 급제하여, 당신의 넋이나마 편안히 쉴 수 있도록 천도재를 올리고, 이 무덤에 비석을 세워주겠소. 그러니 부디 그곳에서는 춥지 말고 편히 쉬시오."
선비는 무덤 앞에서 한참을 울다가,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의 눈빛은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습니다. 더 이상 가난하고 나약한 선비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목숨 건 희생으로 얻은 두 번째 삶, 그 무게를 아는 자의 단단한 결의가 서려 있었지요.
그로부터 3년 뒤, 한양 도성에는 장원 급제자의 이름이 방방곡곡 울려 퍼졌습니다.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금의환향하는 박 씨. 그는 벼슬길에 올라서도 청렴결백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는데, 매년 기일이 되면 아무리 바쁜 나랏일이 있어도 꼭 강원도 그 산골짜기를 찾아가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대감, 그곳에 누가 묻혀 있기에 그토록 정성을 쏟으십니까? 조상님의 묘소입니까?" 하고 물으면, 박 씨는 그저 쓸쓸하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 생명의 은인이자, 내 마음속 영원한 정인(情人)이 잠들어 있다네." 비록 산 사람과 죽은 귀신의 인연이었으나, 그 깊고 진한 사랑은 생사를 넘어 전설이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베푼 작은 온기가, 언젠가는 나를 구하는 큰 기적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유튜브 엔딩 멘트
자, 여러분. 오늘 들려드린 『어우야담』 속 선비와 귀신 여인의 이야기, 어떠셨습니까? 비록 몸은 차가운 귀신이었으나, 그 마음만은 그 어떤 산 사람보다 따뜻하고 의로웠던 여인. 그리고 그런 그녀를 편견 없이 사랑으로 품어준 선비의 이야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하지 않으십니까?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여, 때로는 두려움 속에 찾아오기도 하고 재앙 속에서 꽃피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옛말에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 했습니다.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다는 뜻이지요. 선비가 베푼 따뜻한 아랫목 한 켠이 자신의 목숨을 구했듯, 오늘 여러분이 베푼 작은 친절이 훗날 어떤 복이 되어 돌아올지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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