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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쌀독 대신 머슴을 고른 막내아들의 대역전
형들은 금은과 논문서를 챙겼지만 막내는 사람 하나의 됨됨이를 믿었고, 그 머슴의 지혜가 무너진 집안을 다시 일으켜 끝내 모두가 웃는 결말로 가는 이야기
태그 (1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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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200자 이상)
여러분, 재산을 물려받을 때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금덩이, 논문서, 쌀 가득한 곳간. 누구라도 눈에 보이는 재물부터 챙기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 한 막내아들은 아버지가 남긴 금은보화와 전답을 모조리 형들에게 넘기고, 고작 머슴 하나를 골랐다고 합니다. 미련한 짓이라 비웃음을 샀지요. 그러나 그 머슴의 됨됨이와 지혜가 무너진 집안을 통째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사람 하나를 알아보는 눈이 금은보화보다 더 큰 재산이 된다는 것을, 오늘 밤 이 이야기가 들려드리겠습니다. 자, 편안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보세요.
※ 1: 부자 영감의 유언
옛날, 아주 먼 옛날이었습니다. 한양에서 반나절쯤 걸어가면 너른 들판 한가운데 오래된 마을이 하나 있었지요. 마을 이름은 버드내, 버드나무가 개울가를 따라 늘어서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그 버드내 마을에 최 영감이라 불리는 부자가 살고 있었지요. 최 영감의 재산이 얼마나 컸느냐 하면, 논이 백 마지기요, 밭이 쉰 마지기요, 곳간에는 쌀이 천 섬이 쌓여 있었고, 안채 깊숙한 곳 궤짝 안에는 금덩이와 은덩이가 그득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최 영감의 집을 가리켜 최 부잣집이라 불렀고, 고을에서도 최 영감만큼 살림이 넉넉한 이가 없었지요.
그런데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은 아무리 부자라 해도 돈으로 살 수 없는 법이었습니다. 최 영감이 예순을 넘기더니 병이 들었지요. 처음에는 기침이 잦더니, 한 달이 지나자 자리보전을 하게 되었고, 두 달이 지나자 일어나 앉는 것조차 힘들어졌습니다.
최 영감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지요. 큰아들 최태주, 둘째 아들 최태봉, 그리고 막내 아들 최태평이었습니다. 큰아들은 덩치가 크고 목소리가 우렁찼으며, 둘째는 눈치가 빠르고 셈에 밝았지요. 막내 태평이는 이름 그대로 성격이 느긋하고 마음이 여린 청년이었습니다. 형들이 보기에 막내는 좀 모자란 구석이 있었지요. 세상 물정을 모르고, 지나가는 거지에게 밥을 퍼주고, 일머리가 없어 농사일을 시키면 풀 한 포기 뽑다가 벌레를 발견하면 한나절을 들여다보고 앉아 있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요.
어느 날 최 영감이 세 아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기침을 콜록콜록 하며 겨우 몸을 일으킨 최 영감의 얼굴은 황납빛이었고, 눈만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지요.
"얘들아, 가까이 와 앉거라."
세 아들이 아버지의 병상 앞에 나란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약은 드셨습니까?"
큰아들 태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지요. 최 영감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약이고 뭐고, 이 몸뚱이가 더 버텨주질 않는구나. 내 이제 얼마 못 갈 것 같다."
"아버지, 그런 말씀 마십시오!"
둘째 태봉이가 말했지만, 최 영감의 눈빛은 이미 결심이 서 있는 사람의 것이었지요.
"들어라. 내가 평생을 모은 재산을 너희 셋에게 나누어 주려 한다. 내가 눈 감기 전에 이것을 매듭짓지 않으면, 너희끼리 싸울 게 뻔하니 말이다."
방 안에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큰아들과 둘째의 눈이 반짝 빛났지요. 솔직히 말하면, 두 사람은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질수록 재산 이야기가 언제 나올까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최 영감이 기침을 한 번 하고 말을 이었지요.
"큰아들 태주에게는 논 백 마지기와 밭 쉰 마지기를 주마. 이 땅은 우리 집안의 뿌리이니, 맏이인 네가 지켜야 한다."
큰아들 태주의 얼굴에 홍조가 돌았습니다.
'논 백 마지기에 밭 쉰 마지기라. 이것만 있으면 평생 굶을 일 없겠구나.'
"둘째 태봉에게는 곳간의 쌀 천 섬과 궤짝 안의 금은을 주마. 네가 셈이 밝으니, 이것을 밑천 삼아 장사를 해도 좋고, 불려도 좋다."
둘째 태봉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지요.
'쌀 천 섬에 금은보화라. 이것이면 고을에서 제일가는 부자 소리를 듣겠구나.'
"그러면 막내에게는 무엇을 주실 겁니까?"
큰아들이 대놓고 물었습니다. 최 영감이 막내 태평을 바라보았지요. 태평은 형들과 달리 재산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이 얼굴에 없었습니다. 그저 아버지의 창백한 얼굴이 걱정스러운 듯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지요.
"막내 태평에게는, 글쎄다. 나머지를 주마."
"나머지라 하시면?"
태봉이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논밭은 태주에게, 쌀과 금은은 태봉에게 주었으니, 남는 것이라 해봐야 저 바깥채 초가집과 늙은 소 한 마리, 그리고 살림살이 몇 가지, 또 머슴 돌쇠가 있느니라."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습니다. 큰아들과 둘째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입을 꾹 다물었지요.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막내에게는 쥐꼬리만큼 주시는구나. 뭐, 막내니까 그럴 만도 하지.'
태평은 아무 말 없이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최 영감이 태평의 눈을 들여다보았지요. 부자 사이에 말없는 눈빛이 오갔습니다.
"태평아."
"예, 아버지."
"서운하지 않느냐?"
태평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재산은 형님들이 알아서 잘 쓰실 것입니다."
최 영감의 눈가에 주름이 깊어졌습니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지요.
"그래, 네가 그런 놈이지. 어릴 때부터 그랬어."
최 영감이 기침을 크게 하더니 다시 자리에 누웠습니다.
"내일 아침, 재산을 나누어라. 내 눈으로 보고 싶다."
세 아들이 물러났지요. 태주와 태봉은 방을 나서자마자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형님, 아버지가 공평하게 나누어 주셨으니 불만은 없지요?"
"없고말고. 막내야 뭐, 원래 좀 그렇지 않느냐. 세상물정을 모르니 재산을 줘봐야 날려먹을 게 뻔하고."
"그러게 말입니다. 차라리 적게 받는 게 막내한테는 나을 겁니다."
두 형은 그렇게 웃으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지요.
태평만이 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별이 초롱초롱 박힌 밤하늘이었지요.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구나. 재산이 뭐가 대수랴. 아버지만 나으시면 좋겠는데.'
마당 한켠 머슴방에서 불빛이 새어나왔습니다. 돌쇠가 아직 깨어 있는 모양이었지요. 태평은 그 불빛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안채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버드내 마을 위로 바람이 한 줄기 불었습니다. 느긋하고 따뜻한 봄바람이 아니라, 무언가가 변하려 하는 듯한 묘한 바람이었지요.
※ 2: 막내의 선택
이튿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최 영감의 재산 분배가 시작되었지요. 마당에 식솔들이 모두 모였고, 이장까지 증인으로 불려왔습니다. 최 영감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으므로, 안방 문을 활짝 열어놓고 마당의 광경을 지켜보았지요.
큰아들 태주가 먼저 나섰습니다. 가슴을 쫙 펴고 씩씩하게 걸어 나와 논문서와 밭문서를 건네받았지요. 두툼한 문서 뭉치를 손에 쥐자 태주의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갔습니다.
"아버지, 잘 쓰겠습니다. 이 땅을 절대 남의 손에 넘기지 않겠습니다."
둘째 태봉이 그 뒤를 이었지요. 곳간 열쇠를 받아들고, 궤짝을 열어 금은을 확인하는 태봉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아버지가 모아놓은 금은이 생각보다 많았던 모양이지요.
"아버지, 이것을 밑천 삼아 반드시 크게 불리겠습니다."
태봉이 궤짝 뚜껑을 소중히 닫으며 말했습니다.
이제 막내 태평의 차례였지요. 마당에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바깥채 초가집 한 칸, 늙어서 이가 다 빠진 소 한 마리, 삐걱거리는 지게 하나, 이가 빠진 솥단지, 그리고 머슴방에서 나와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돌쇠뿐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렸지요.
"저것 봐라. 막내에게 돌아간 게 뭐가 있어?"
"쌀독도 없고, 논문서도 없고, 겨우 초가집에 늙은 소 한 마리라니."
"에이, 불쌍하다 불쌍해."
태평은 마당에 남은 것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초가집, 늙은 소, 삐걱거리는 살림살이, 그리고 돌쇠. 태평의 눈이 돌쇠에게 멈추었지요.
돌쇠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사내였습니다. 서른쯤 되어 보이기도 하고, 마흔이 넘어 보이기도 했지요. 키는 보통이었고, 얼굴은 볕에 그을려 거뭇했으며, 눈매가 유난히 깊었습니다. 말이 적고 일을 잘했지만, 다른 머슴들과 잘 어울리지 않아 사람들이 무뚝뚝한 사람이라 여겼지요. 최 부잣집에 온 지 오래되었건만, 그의 과거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태평이 돌쇠에게 다가갔습니다.
"돌쇠야."
"예, 도련님."
"네가 나한테 왔구나."
돌쇠가 고개를 살짝 숙였지요.
"그런 셈이 되었습니다."
태평이 빙긋 웃었습니다.
"잘됐다."
형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요. 큰아들 태주가 코웃음을 쳤습니다.
"잘됐다니? 초가집 한 칸에 머슴 하나 달랑 받아놓고 잘됐다니, 너는 참 속이 편하구나."
둘째 태봉도 한마디 거들었지요.
"태평아, 솔직히 형들이 미안하긴 하다만, 아버지가 정하신 일이니 어쩌겠느냐. 딱한 처지가 되면 형들이 밥은 안 굶기마."
태평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형님들, 걱정 마십시오. 저는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찼지요.
"저 막내, 원래 좀 모자라더니 역시나 그렇구만."
"머슴 하나 데리고 뭘 한다고."
"불쌍한 것. 세상물정을 몰라도 유분수지."
사람들의 비웃음이 마당에 가득했지만, 태평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돌쇠를 데리고 바깥채 초가집으로 향했지요.
초가집은 허름했습니다. 벽에 금이 가 있었고, 지붕의 이엉은 군데군데 뜯겨져 있었지요. 방은 두 칸이었는데, 하나는 윗방, 하나는 아랫방이었습니다.
태평이 윗방 문을 열고 돌쇠를 돌아보았지요.
"돌쇠야, 네가 이 방을 써라."
돌쇠가 눈을 크게 떴습니다.
"도련님, 그건 안 됩니다. 윗방은 도련님이 쓰셔야지요."
"아니다. 네가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윗방이 맞다."
"저는 머슴입니다, 도련님."
태평이 고개를 저었지요.
"오늘부터 너는 머슴이 아니다. 나와 한집에 사는 식구다. 식구한테 상하를 따질 것이 뭐가 있느냐."
돌쇠가 한참 태평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깊은 눈에 무엇이 스쳐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윽고 돌쇠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요.
"도련님, 왜 저를 택하셨습니까?"
"뭘?"
"재산을 나눌 때 말입니다. 초가집이든 늙은 소든, 그래도 물건이 아닙니까. 왜 하필 저를 가장 먼저 바라보셨습니까."
태평이 잠시 생각하더니 빙그레 웃었습니다.
"글쎄다.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네 눈을 보니까, 그냥 느낌이 왔다. 이 사람이면 된다, 하는 느낌 말이다."
"느낌이라."
"그래, 느낌. 논문서는 불에 타면 없어지고, 금은은 도둑이 가져가면 끝이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지 않느냐.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고, 길을 찾는다. 내가 볼 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재산은 사람이다."
돌쇠가 아무 말 없이 태평을 바라보았습니다. 깊은 눈에 떨림이 인 것을, 태평은 눈치채지 못했지요.
'이 도련님이, 참으로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돌쇠가 고개를 깊이 숙였습니다.
"도련님, 저를 믿어주신 그 마음, 반드시 갚겠습니다."
태평이 손을 내저었지요.
"갚을 것까지야. 그냥 같이 잘 살면 되지."
그렇게 막내 태평과 머슴 돌쇠의 새 살림이 시작되었습니다. 초가집 한 칸, 늙은 소 한 마리, 지게 하나, 솥단지 하나. 세상에서 가장 볼품없는 살림이었지만, 태평의 얼굴에는 걱정이 없었지요.
다만 한 가지, 당장 내일 먹을 쌀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태평의 아내 옥분이가 부엌에서 나오며 한숨을 쉬었지요.
"여보, 쌀이 한 톨도 없어요. 내일 아침은 뭘 지어 먹지요?"
태평이 머리를 긁적이며 돌쇠를 바라보았습니다.
"돌쇠야, 어떡하면 좋겠느냐?"
돌쇠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지요.
"도련님, 내일 장이 서는 날입니다. 장에 한 번 나가 보시지요."
"장에? 살 돈이 있어야 장에 가지."
돌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습니다. 처음 보는 미소였지요.
"돈이 없어도 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 3: 빈손의 시작
해가 뜨자 태평과 돌쇠는 장터를 향해 걸었습니다. 주머니에는 동전 한 닢 없었지요. 옥분이가 그나마 챙겨준 것은 누런 보리 주먹밥 두 덩이가 전부였습니다. 태평이 주먹밥 하나를 돌쇠에게 건네며 말했지요.
"이거라도 먹고 가자. 빈속에 걸으면 다리에 힘이 없다."
"도련님이 드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아, 됐다. 같이 먹자니까."
두 사람이 나란히 주먹밥을 우적우적 씹으며 길을 걸었습니다. 보리 주먹밥이 목에 걸려 물을 벌컥벌컥 마셔야 했지만, 봄바람이 얼굴을 스치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지요.
장터는 사람으로 북적거렸습니다. 소장수, 옷감장수, 엿장수, 떡장수, 생선장수, 약재장수. 온갖 물건이 쏟아져 나왔고, 흥정하는 소리가 왁자지껄했지요.
태평이 장터를 둘러보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돌쇠야, 좋은 물건이 참 많다만, 우리가 살 수 있는 건 하나도 없구나."
돌쇠가 장터를 천천히 둘러보았습니다. 그의 깊은 눈이 장터 구석구석을 훑었지요. 번쩍이는 비단도, 싱싱한 생선도, 달콤한 엿도 돌쇠의 시선을 끌지 못했습니다. 대신 돌쇠의 눈이 멈춘 곳은 장터 한쪽 구석이었지요.
그곳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물건들이 늘어져 있었습니다. 이가 빠진 도자기, 상이 까진 반닫이, 색이 바랜 병풍, 다리 하나가 부러진 소반 같은 것들이었지요.
"도련님, 저기 좀 보십시오."
"저건, 뭐다. 아무도 안 사는 헌물건 아니냐."
"맞습니다. 아무도 안 삽니다. 그래서 값이 쌉니다."
태평이 고개를 갸웃거렸지요.
"싸면 뭘 하느냐. 돈이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
돌쇠가 태평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도련님, 저 물건들 중에 값어치 있는 것이 숨어 있습니다."
"값어치 있는 것이?"
"예. 세상 사람들은 겉만 보고 물건의 가치를 매깁니다. 이가 빠지면 버리고, 색이 바래면 버립니다. 하지만 물건의 진짜 값어치는 겉에 있지 않습니다."
돌쇠가 장터 구석으로 성큼성큼 걸어갔지요. 태평이 뒤를 따랐습니다.
돌쇠가 맨 먼저 집어 든 것은 색이 바랜 병풍이었습니다. 누런 종이 위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때가 타고 접힌 자국이 있어 볼품이 없었지요.
"이 병풍, 얼마요?"
물건 주인이 시큰둥하게 대답했습니다.
"에이, 그 헌 거. 동전 닷 냥만 주시오. 아니, 석 냥도 좋소. 누가 사가기나 하면 감지덕지지."
돌쇠가 병풍을 펼쳐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돌쇠의 눈이 번쩍 빛났지요.
"도련님, 이것을 사야 합니다."
태평이 병풍을 보았지만 무엇이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게 뭐가 좋은 건데?"
돌쇠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지요.
"이 그림, 필체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이름 있는 화원의 작품입니다. 때가 타서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뿐, 깨끗이 손질하면 큰 값어치가 있습니다."
태평의 눈이 동그래졌지요.
"정말이냐?"
"제 눈을 믿어주십시오."
태평이 주머니를 뒤졌습니다.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없었지요. 그러자 돌쇠가 자신의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습니다. 작은 주머니였는데, 그 안에 동전 몇 닢이 들어 있었지요.
"이건 내가 몇 년 동안 틈틈이 모은 것입니다. 도련님, 이것을 쓰십시오."
"네 돈을 내가 어떻게 쓰느냐."
"저는 도련님의 식구라 하셨지요. 식구끼리 내 돈 네 돈이 어디 있습니까."
태평이 잠시 돌쇠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좋다. 네 눈을 믿겠다."
태평이 돌쇠의 돈으로 바랜 병풍을 석 냥에 샀지요. 물건 주인은 헌 병풍을 사가는 사람이 있다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돌쇠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지요. 상이 까진 반닫이를 집어 들어 서랍을 열고 닫으며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이 반닫이, 나무가 좋습니다. 먹감나무인데, 겉만 손질하면 새것보다 낫습니다."
"저 도자기는 어떠냐?"
태평이 이가 빠진 도자기를 가리켰지요. 돌쇠가 도자기를 들어 올려 바닥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습니다.
"저건 안 됩니다. 겉은 그럴싸하지만 흙이 나쁩니다. 손질해봐야 값이 오르지 않습니다."
태평이 감탄했지요.
"돌쇠야, 너는 대체 이런 것을 어디서 배운 것이냐?"
돌쇠가 잠시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의 눈에 순간 복잡한 빛이 스쳤지만, 이내 사라졌지요.
"그냥, 여기저기 떠돌며 어깨너머로 본 것입니다."
태평은 더 캐묻지 않았습니다. 돌쇠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굳이 물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날 두 사람은 돌쇠의 돈으로 바랜 병풍 한 점, 먹감나무 반닫이 하나, 그리고 낡은 서안 하나를 샀습니다. 모두 합쳐 열 냥이 채 안 되는 돈이었지요.
물건을 지게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을 사람들이 또 수군거렸습니다.
"저것 봐. 막내가 헌물건을 잔뜩 사왔네."
"아이고, 저 머슴이 꼬드겨서 쓸데없는 짓을 시키는 게 아닌가 몰라."
"막내네는 이제 완전히 거덜 나겠구만."
태평은 그 소리에 개의치 않았지만, 옥분이는 달랐지요. 남편이 지게에 헌물건을 잔뜩 지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여보, 이게 뭐예요? 쌀은요? 쌀은 안 사왔어요?"
"쌀은, 그게, 좀 사정이 있어서."
옥분이가 한숨을 푹 쉬었지요.
"아이고, 당장 내일 죽을 끓일 쌀도 없는데 헌물건을 사왔다고요? 이것을 씹어 먹으라는 거예요?"
태평이 머리를 긁적이며 돌쇠를 바라보았습니다. 돌쇠가 조용히 나서서 옥분이에게 말했지요.
"마님, 이틀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흘째 되는 날 쌀이 들어올 것입니다."
"사흘이요? 이틀 동안은 뭘 먹고 살라고요?"
돌쇠가 마당 한켠의 텃밭을 가리켰습니다.
"저기 시래기가 좀 남아 있습니다. 이틀은 시래기죽으로 버텨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마님."
옥분이가 시래기를 보며 또 한숨을 쉬었지만, 남편이 믿겠다는 사람을 자기가 어찌할 수는 없었지요.
그날 밤 돌쇠는 초가집 뒤뜰에서 병풍을 펼치고 정성스럽게 손질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뜻한 물에 적신 헝겊으로 때를 살살 닦아내자, 그림 아래 숨어 있던 색이 하나둘 드러났지요. 태평이 옆에서 지켜보며 감탄했습니다.
'저 그림이, 원래 이런 색이었단 말인가. 돌쇠 눈이 정말 대단하구나.'
태평은 그때 처음으로 확신했습니다.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 4: 돌쇠의 첫 번째 수
돌쇠는 밤새 병풍을 손질했습니다. 겹겹이 쌓인 때를 정성스럽게 벗겨내자, 그 아래서 놀라운 그림이 모습을 드러냈지요. 산수화였습니다. 깊은 산골짜기에 폭포가 쏟아지고, 그 아래 늙은 소나무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으며, 바위 위에 신선이 앉아 학을 바라보는 그림이었습니다. 붓놀림이 거침없으면서도 섬세하여,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솜씨였지요.
태평이 아침에 일어나 손질이 끝난 병풍을 보고 입을 딱 벌렸습니다.
"이것이, 이것이 어제 그 헌 병풍이란 말이냐?"
"같은 물건입니다. 때를 벗겼을 뿐이지요."
태평이 그림에 코를 바짝 대고 들여다보았지요.
"글쎄, 나는 그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건 확실히 아무나 그린 게 아닌 것 같다."
돌쇠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낙관을 보십시오. 여기 작게 찍혀 있는 이 도장, 이것은 이름난 화원의 낙관입니다. 이 그림 한 점이면 쌀 백 섬은 너끈히 삽니다."
"쌀 백 섬!"
태평의 눈이 사발만 해졌지요. 쌀 백 섬이면 한 가족이 몇 년을 먹고도 남을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누구한테 팔 수 있겠느냐? 우리 같은 사람이 가져가면 훔친 물건 아니냐고 의심받을 텐데."
돌쇠가 빙긋 웃었지요.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한양에 가면 물건의 값어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인 거간꾼들이지요. 그들을 통하면 됩니다."
"한양까지 간단 말이냐?"
"예. 다녀오겠습니다. 도련님은 여기 계십시오."
그날 돌쇠는 병풍을 곱게 말아 등에 지고 한양으로 떠났습니다. 태평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돌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지요.
'돌쇠가 그 병풍을 들고 도망치면 어쩌지?'
그 생각이 스쳤지만, 태평은 곧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다. 돌쇠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 눈을 믿자.'
옥분이는 시래기죽을 쑤며 불만이 가득했지요.
"여보, 돌쇠가 정말 돌아오긴 할까요? 헌 병풍 하나 들고 한양에 갔다는데, 그게 말이 돼요?"
"돌아온다. 반드시 돌아온다."
"근거가 뭔데요?"
"근거 같은 건 없다. 그냥 믿는 거지."
옥분이가 국자로 죽을 저으며 혀를 끌끌 찼습니다.
"아이고, 이 양반은 사람 좋은 게 병이라니까."
이틀이 지났습니다. 셋째 날 아침, 태평이 마당에서 빗자루질을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먼지를 일으키며 누군가 다가왔지요. 돌쇠였습니다. 그런데 돌쇠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소달구지 하나가 따라오고 있었지요.
태평이 달려나갔습니다.
"돌쇠야!"
"도련님, 다녀왔습니다."
"그, 그 병풍은?"
"팔았습니다. 한양의 대감댁에서 삼백 냥을 주었습니다."
"삼백 냥!"
옥분이가 부엌에서 튀어나왔지요.
"뭐라고요? 삼백 냥이요?"
돌쇠가 소달구지를 가리켰습니다. 달구지 위에는 쌀가마니가 수북이 실려 있었지요.
"쌀 오십 섬을 사왔습니다. 나머지 돈은 여기 있습니다."
돌쇠가 묵직한 돈주머니를 태평에게 건넸습니다. 태평이 돈주머니를 받아들고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지요.
옥분이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아이고, 세상에. 쌀이에요, 쌀!"
옥분이가 달구지로 달려가 쌀가마니를 끌어안았지요. 시래기죽만 먹던 사람에게 쌀가마니가 얼마나 눈물겨운 것인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었습니다.
태평이 돌쇠의 손을 덥석 잡았지요.
"돌쇠야, 고맙다."
"고마울 것 없습니다. 시작일 뿐입니다."
"시작이라고?"
돌쇠의 눈이 반짝였습니다. 그 깊은 눈 속에 큰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것을 태평은 느낄 수 있었지요.
"도련님, 이 돈으로 장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장터에서 값어치를 몰라 헐값에 팔리는 물건들을 사 모으고, 손질하여 제값에 파는 것입니다. 저는 물건을 보는 눈이 있고, 도련님은 사람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둘이 합치면 됩니다."
태평이 고개를 갸웃거렸지요.
"사람을 끄는 힘이라니? 나한테 그런 게 있느냐?"
"있습니다. 도련님은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습니다. 도련님과 이야기하면 아무리 까다로운 사람도 마음을 여지요. 장사에서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인지 도련님은 모르실 겁니다."
태평이 멋쩍게 웃었습니다.
"그런 것도 재주가 되느냐?"
"세상에서 가장 귀한 재주입니다."
돌쇠의 말대로 두 사람은 장사를 시작했지요. 돌쇠가 눈을 밝혀 값어치 있는 물건을 찾아내면, 태평이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맺었습니다. 태평의 허허롭고 솔직한 성격은 장사에서 의외의 무기가 되었지요.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니 거래처에서 신뢰를 얻었고, 한번 관계를 맺으면 끈끈하게 이어갔습니다.
한 달이 지나자 두 사람의 살림이 눈에 띄게 나아졌지요. 석 달이 지나자 초가집을 고치고 방을 한 칸 더 늘렸습니다. 반년이 지나자 마을에서 태평네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지요.
"야, 막내네가 요즘 장사를 잘한다더라?"
"헌물건을 사다가 새것으로 만들어 파는데,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더군."
"다 그 머슴 돌쇠 덕이라지? 돌쇠라는 놈이 보통 머슴이 아닌 모양이야."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한쪽이 잘 되면 다른 쪽이 기울기도 하는 법이지요. 태평네가 점점 일어서는 동안, 형들의 사정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큰형 태주는 논 백 마지기를 물려받고도 농사에는 관심이 없었지요. 큰돈을 쥐고 나니 으스대고 싶어져서, 고을 양반네들과 어울리며 술판을 벌이고 노름판에 발을 들이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둘째 태봉은 금은을 밑천 삼아 장사를 시작했지만, 셈에만 밝았지 사람을 보는 눈이 없었지요. 믿어서는 안 될 사람을 믿고, 의심해야 할 때 의심하지 못했습니다.
태평이 밤에 마당에 앉아 별을 보며 한숨을 쉬었지요.
'형님들은 잘 지내고 계실까. 소식이 뜸한 게 신경 쓰이는구나.'
돌쇠가 옆에 앉으며 말했습니다.
"도련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십니다."
"형님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돌쇠가 하늘을 올려다보았지요. 별이 촘촘히 박힌 밤하늘이었습니다.
"형님 분들의 소식이 머지않아 들려올 것입니다. 그때 도련님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무슨 뜻이냐?"
"그때가 되면 아실 것입니다."
돌쇠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지요. 태평은 돌쇠의 그런 말투에 이미 익숙했습니다. 이 사람은 말이 적지만,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맞아떨어졌으니까요.
밤바람이 불었습니다. 초가집 처마 밑에서 풍경이 딸랑 소리를 내었지요. 태평은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습니다.
※ 5: 형들의 몰락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들판의 벼가 누렇게 고개를 숙이고, 감나무에 홍시가 주렁주렁 달린 계절이었지요. 그런데 버드내 마을에는 곱지 않은 소문이 바람처럼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최 부잣집 큰아들이 노름빚에 허덕인다더라."
"논문서를 잡히고 다닌다면서? 백 마지기를 통째로?"
"에이, 설마. 백 마지기를 누가 통째로 잡힌대?"
"아, 진짜라니까. 고을 노름꾼들 사이에서는 이미 다 알려진 얘기야."
소문은 사실이었습니다. 큰형 태주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논 백 마지기를 불과 반년 만에 반 넘게 날려버린 것이지요. 처음에는 양반네들과 어울려 풍류를 즐기는 정도였습니다. 술자리에서 시 한 수 읊고, 기생집에서 거문고 가락이나 듣는 그런 수준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술자리에서 누군가가 투전판을 벌였고, 태주는 거기에 발을 들이밀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이겼지요. 노름이란 것이 원래 그렇습니다. 처음에 살짝 맛을 보여주고는 점점 깊은 수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니까요. 태주는 이기는 맛에 취해 판돈을 키웠고, 지기 시작하자 본전을 찾겠다며 더 큰돈을 걸었습니다. 그 악순환이 반복되더니, 급기야 논문서를 빚 담보로 내놓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지요.
태주의 아내가 울며불며 매달렸습니다.
"여보, 제발 정신 차려요! 아버지가 물려주신 논이 얼마 안 남았어요!"
"시끄럽다! 내일 한 판만 더 하면 다 되찾는다고!"
"그 소리를 벌써 몇 번째 하는 거예요!"
태주는 아내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지요. 노름에 빠진 사람의 귀에는 어떤 말도 들어가지 않는 법이었습니다.
한편 둘째 태봉의 사정도 녹록지 않았지요. 태봉은 셈에 밝은 머리를 믿고 장사에 뛰어들었습니다. 금은을 밑천 삼아 비단 장사를 시작한 것이지요. 한양에서 비단을 떼어다가 지방 고을에 파는 장사였는데, 처음 한두 번은 짭짤한 이문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태봉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지요. 숫자는 잘 다루었지만 사람을 읽는 눈이 없었습니다. 거래처 사람이 웃으면서 말하면 곧이곧대로 믿었고, 달콤한 말에 쉽게 넘어갔지요.
어느 날 한양에서 온 장사치가 태봉을 찾아왔습니다. 말쑥한 차림에 입담이 좋은 사내였지요.
"최 서방, 큰 건이 하나 있소. 중국에서 들어오는 최상급 비단이 있는데, 이번에 한꺼번에 떼어오면 열 배는 남는 장사요."
"열 배라고?"
태봉의 눈이 번쩍 뜨였지요.
"다만 물량이 크니 밑천이 많이 필요하오. 최 서방이 금은을 대고, 나는 물건을 구해오겠소. 이문은 반반씩 나누는 거요."
태봉은 그 달콤한 제안에 혹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금은의 절반 이상을 그 장사치에게 건넸지요. 그리고 한 달을 기다렸습니다. 두 달을 기다렸습니다. 석 달이 지나도 그 장사치는 나타나지 않았지요.
"여보, 그 사람 사기꾼 아니에요?"
태봉의 아내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아, 아닐 거다. 중국에서 물건 떼어오려면 시간이 걸리는 법이야."
"석 달이나 걸려요? 연락도 없이?"
태봉이 한양으로 달려가 수소문했지요. 그 장사치의 행방을 찾았지만, 글쎄요, 이미 야반도주를 한 뒤였습니다. 빈 방에 남은 것은 먼지뿐이었지요.
태봉이 텅 빈 방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습니다.
'아버지가 평생 모은 금은을. 내가 사기꾼에게 넘기다니. 셈에 밝다고 자만하더니, 이 꼴이 뭔가.'
겨울이 오고 있었습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지요.
큰형 태주가 먼저 막내 태평을 찾아왔습니다. 초가집이었던 태평의 집은 어느새 번듯한 기와집으로 바뀌어 있었지요. 마당에는 물건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고, 일꾼 두어 명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태주가 대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지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막내를 깔보며 코웃음을 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막내에게 손을 벌리러 온다는 것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자존심으로 밥을 지을 수는 없었습니다.
태평이 대문을 열고 나왔지요.
"형님? 형님이 어쩐 일로 여기까지."
태주의 행색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옷은 때가 절어 있었고, 얼굴은 수척하게 말라 있었지요. 몇 달 전 허리 쫙 펴고 논문서를 받아들던 그 위풍당당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태, 태평아."
태주가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더니, 결국 고개를 떨궜지요.
"형이, 형이 잘못했다. 아버지 재산을 노름으로 다 날렸다. 논이 스무 마지기밖에 안 남았다."
태평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 찼습니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수하고 조카들이 굶고 있다. 태평아, 쌀 좀, 쌀 좀만 꿔다오."
태주의 목소리가 떨렸지요. 큰형이 동생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쌀을 구걸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태평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형님, 고개 드십시오. 제가 형님인데 당연히 도와야지요."
태평이 곳간에서 쌀을 내왔지요. 쌀가마니 다섯을 지게에 실어 태주에게 건넸습니다. 태주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요.
"태평아, 고, 고맙다."
"형님, 고맙긴요. 형제인데."
태주가 쌀을 지고 돌아간 지 열흘도 안 되어, 이번에는 둘째 태봉이 찾아왔습니다. 태봉의 꼴도 만만치 않았지요. 한때 셈 밝기로 소문난 사람의 눈에 초점이 없었고, 볼이 홀쭉하게 패여 있었습니다.
"태평아, 형이 사기를 당했다. 아버지 금은을 통째로."
태봉이 마루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지요.
"셈은 밝았는데 사람은 못 봤다. 숫자만 믿고 사람을 안 봤으니 이 꼴이 난 거다. 내가 어리석었다."
태평이 형의 등을 토닥였습니다.
"형님,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앞으로 어찌하실 건지가 중요하지요."
"앞으로라니. 밑천이 없는데 뭘 어찌하겠느냐. 장사를 다시 시작하고 싶어도 종잣돈이 한 푼도 없다."
태평이 잠시 생각하더니 방 안으로 들어가 돈주머니를 가져왔지요.
"형님, 이것으로 다시 시작하십시오."
"이건, 이건 안 된다. 네 돈을 내가 어떻게."
"형님, 아까 형님이 직접 말씀하셨지요. 숫자만 믿고 사람을 안 봤다고. 이번에는 사람을 보고 장사하십시오."
태봉이 태평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동생의 눈에는 원망도 비웃음도 없었지요. 그저 형을 걱정하는 따뜻한 눈빛뿐이었습니다.
"태평아, 네가 어릴 때부터 좀 모자란 줄 알았는데, 형이 틀렸다. 모자란 건 형이었구나."
태봉이 고개를 숙였지요.
형들이 돌아간 뒤, 태평이 마루에 앉아 한숨을 쉬었습니다. 옥분이가 옆에 와 앉았지요.
"여보, 형님들한테 너무 많이 준 거 아니에요? 우리도 넉넉한 형편이 아닌데."
"식구인데 어쩌겠소. 형님들이 굶는 걸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소."
옥분이가 한숨을 쉬면서도 남편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요.
돌쇠가 마당을 쓸다가 태평에게 다가왔습니다.
"도련님, 잘하셨습니다."
"잘하긴 뭘. 형님들이 고생하시는데 마음이 아프다."
돌쇠가 빗자루를 세워놓고 태평 맞은편에 앉았지요.
"도련님, 이제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데?"
"형님 분들을 그냥 도와주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물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주셔야 합니다."
태평이 돌쇠를 바라보았지요.
"형님들에게 일을 맡기라는 뜻이냐?"
돌쇠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큰도련님은 사람들을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크고 결단이 빠르지요. 노름판에서 쓰던 그 배짱을 장사판에서 쓰면 됩니다. 둘째 도련님은 셈에 밝습니다. 사람을 못 보는 약점만 보완하면 장부 관리에 이보다 더 좋은 사람이 없습니다."
태평의 눈이 반짝였지요.
"그렇구나. 형님들의 단점만 볼 게 아니라 장점을 살리면 되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사람은 적재적소에 쓰면 누구나 보배입니다."
태평이 무릎을 탁 쳤습니다.
"돌쇠야, 네 말이 맞다. 내일 당장 형님들을 다시 부르겠다."
돌쇠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지요. 큰 그림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맞춰지고 있었습니다.
※ 6: 돌쇠의 큰 그림
태평이 두 형을 다시 불러모았습니다. 초가집에서 기와집으로 바뀐 태평의 집 마루에 세 형제가 나란히 앉았지요. 큰형 태주는 여전히 풀이 죽어 있었고, 둘째 태봉은 눈에 힘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 다 동생 앞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지요.
태평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형님들, 제가 오늘 형님들을 부른 것은 쌀을 더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태주가 고개를 들었지요.
"그럼 뭣 때문에?"
"같이 장사를 하자고 부른 것입니다."
태봉이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같이 장사를? 우리가?"
태평이 돌쇠를 바라보았지요. 돌쇠가 마루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습니다.
"두 분 도련님,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주가 돌쇠를 흘겨보았지요. 머슴 주제에 도련님들 앞에서 말을 꺼내는 것이 마뜩잖은 모양이었습니다.
"머슴이 어디서 주둥아리를."
"형님, 가만 계십시오. 돌쇠가 하는 말은 들어볼 만합니다."
태평이 형을 제지했지요. 태주가 입을 다물었습니다. 지금 형편에 막내 동생 앞에서 큰소리칠 처지가 아니었으니까요.
돌쇠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큰도련님, 노름판에서 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들은 바로는 처음에 크게 이기셨다지요?"
태주가 고개를 끄덕였지요.
"처음에는 이겼다. 연달아 이겼지. 그런데 그게 함정이었어."
"아닙니다. 함정이 아닙니다. 큰도련님은 판을 읽는 눈이 있으십니다. 상대의 표정을 살피고, 분위기를 파악하고, 순간적으로 결단을 내리는 힘이 있지요. 다만 그 힘을 엉뚱한 곳에 쓰셨을 뿐입니다."
태주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지요.
"노름판에서 쓰던 그 눈과 배짱을 장사판에서 쓰시면 됩니다. 거래처를 만나 가격을 흥정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밀어주는 일. 큰도련님의 우렁찬 목소리와 과감한 성격이 딱 맞는 일입니다."
태주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지요. 반박하려 했지만, 돌쇠의 말에 틀린 구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돌쇠가 이번에는 태봉을 바라보았습니다.
"둘째 도련님, 사기를 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셈에 밝으신 분이 사람에게 속으신 것이지요."
태봉이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래, 숫자만 보고 사람을 안 봤지. 그게 내 병통이야."
"그러니 사람을 만나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대신 장부를 맡으십시오.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꼼꼼하게 관리하는 일, 물건의 원가를 계산하고 이문을 따지는 일, 이건 둘째 도련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태봉의 눈에 빛이 돌았지요.
"장부 관리라. 그건, 그건 자신 있다."
돌쇠가 세 형제를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큰도련님은 밖에서 사람을 만나고 거래를 트시고, 둘째 도련님은 안에서 돈과 물건을 관리하시고, 우리 도련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단골을 만드시면 됩니다. 저는 물건을 보는 눈으로 뒤에서 돕겠습니다. 넷이 힘을 합치면, 아버님 때보다 더 큰 살림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마루에 잠시 침묵이 흘렀지요. 태주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머슴, 아니 돌쇠. 네가 대체 누구냐? 보통 머슴이 이런 말을 하지는 않는다."
돌쇠가 잠깐 말을 멈추었지요. 그의 깊은 눈에 오래된 이야기가 서려 있는 듯했지만, 돌쇠는 그것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눈이 좀 밝은 머슴일 뿐입니다."
태주가 돌쇠를 한참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지요.
"좋다. 해보자.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 몸이니."
태봉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도 하겠다. 이번에는 제대로 해보겠다."
태평이 두 형의 손을 잡았지요.
"형님들, 고맙습니다. 우리 셋이 힘을 합치면 못 할 일이 없습니다."
그날부터 세 형제의 장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돌쇠의 그림대로 각자 맡은 자리에서 제 몫을 했지요. 큰형 태주는 장터와 거래처를 누비며 물건을 밀었습니다. 노름판에서 갈고닦은 눈썰미와 배짱은 장사판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지요. 흥정에 들어가면 상대가 꼼짝을 못 했고, 한번 맺은 거래는 절대 어긋나는 법이 없었습니다.
둘째 태봉은 장부를 맡았지요. 돈 한 푼, 물건 하나까지 꼼꼼하게 기록하고 관리했습니다. 어디서 이문이 나고 어디서 손해가 나는지, 태봉의 장부를 보면 한눈에 알 수 있었지요. 사람 대신 숫자를 상대하니 실수가 없었습니다.
태평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장터의 상인들, 고을의 양반들, 지나가는 보부상까지. 태평과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누구나 마음이 편해졌고, 한번 거래한 사람은 반드시 다시 찾아왔지요. 거짓이 없는 사람에게는 신뢰가 따르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돌쇠는 뒤에서 묵묵히 모든 것을 조율했습니다. 어떤 물건을 사야 하는지, 어떤 거래처를 믿어야 하는지, 언제 팔고 언제 기다려야 하는지. 돌쇠의 판단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지요.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습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지요. 세 형제의 장사는 날로 커졌습니다. 처음에는 장터 한 구석에서 시작했던 것이 고을 전체로 퍼졌고, 이웃 고을까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지요.
옥분이가 저녁 밥상을 차리며 웃었습니다.
"여보, 요즘 밥상이 참 풍성해졌어요."
태평이 빙그레 웃었지요.
"다 돌쇠 덕이지."
"그러게요. 그때 돌쇠를 택한 게, 진짜 잘한 일이에요. 그때는 제가 속으로 얼마나 원망했는지 몰라요."
"알고 있었소."
"알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당신이 알아서 믿어줄 때까지 기다린 거지."
옥분이가 국자로 태평의 어깨를 톡 쳤지요.
"이 사람이, 입만 살았어."
두 사람이 웃었습니다. 부엌에서 밥 짓는 냄새가 피어오르고, 마당에서는 돌쇠가 나무를 패는 도끼 소리가 탁탁 울렸지요. 평범하지만, 이 평범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태평은 알고 있었습니다.
※ 7: 되찾은 집안
이태가 지났습니다. 세 형제의 장사는 고을을 넘어 한양까지 이름이 알려졌지요. 물건을 보는 돌쇠의 눈, 흥정을 이끄는 태주의 배짱, 장부를 관리하는 태봉의 셈, 사람의 마음을 얻는 태평의 품성. 이 네 가지가 합쳐지니 당해낼 장사꾼이 없었습니다.
큰형 태주는 노름판에 빠져 잃었던 논을 하나둘 되사들이기 시작했지요. 한때 스무 마지기밖에 안 남았던 논이 다시 오십 마지기, 칠십 마지기로 불어났습니다. 태주가 직접 흥정하여 되사들인 논은 원래 값보다 싸게 들어왔지요. 노름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의 협상력이란 것이 이런 데서 빛을 발한 것입니다.
둘째 태봉은 장부 관리뿐 아니라 투자 판단까지 맡게 되었지요. 사기를 당한 뼈아픈 경험이 오히려 약이 되었습니다. 어떤 거래가 위험한지, 어떤 사람이 수상한지, 한번 당해본 사람이니 귀신같이 알아챘지요. 태봉이 도장을 찍은 거래에서는 단 한 번도 손해가 나지 않았습니다.
세 형제의 살림이 합쳐지니, 최 부잣집의 재산은 아버지 때를 넘어섰지요. 논 백오십 마지기에 밭 팔십 마지기, 곳간에는 쌀이 이천 섬이 쌓였고, 가게가 고을마다 하나씩 생겼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지요.
"아니, 막내네가 저렇게 될 줄 누가 알았어?"
"머슴 하나 달랑 데리고 시작한 사람이 고을 제일 부자가 됐다니."
"역시 사람이 재산이라더니, 그 말이 허투루가 아니었구먼."
어느 날 저녁, 세 형제가 태평의 집 마루에 모여 앉았습니다. 마당에는 감나무가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고, 하늘에는 노을이 곱게 퍼져 있었지요.
큰형 태주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예전의 우렁찬 목소리가 돌아와 있었지만, 그 목소리에 실린 것은 이전과 달랐지요.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태평아, 형이 진작에 할 말이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형님."
태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태평 앞에 꿇어앉았습니다. 둘째 태봉도 따라 꿇어앉았지요. 태평이 놀라 두 형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형님들,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어서 일어나십시오!"
"듣거라, 태평아. 형들이 그동안 너를 얕보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놈, 쓸데없이 착한 놈, 재산을 줘봐야 날려먹을 놈이라고 생각했다."
태주의 목소리가 떨렸지요.
"그런데 재산을 날려먹은 건 형들이었다. 노름에 빠진 것도, 사기를 당한 것도, 다 형들의 어리석음이었다. 그런 형들한테 넌 원망 한마디 없이 쌀을 내주고, 돈을 내주고, 일자리까지 만들어줬다."
태봉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태평아, 아버지가 재산을 나눌 때 네가 가장 적게 받은 게 아니었어. 너는 가장 많이 받은 거였어. 돌쇠라는 사람, 그 사람 하나가 논 백 마지기보다, 금은보화보다 더 큰 재산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태평이 두 형의 손을 잡아 일으켰지요. 태평의 눈에도 눈물이 어려 있었습니다.
"형님들, 저는 형님들이 와 주셔서 그게 제일 기뻤습니다. 솔직히 장사보다, 돈보다, 형님들과 다시 한 식구가 된 것이 저한테는 가장 큰 재산입니다."
세 형제가 얼싸안았지요. 마루 위에서 셋이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큰형이 울고, 둘째가 울고, 막내가 울었지요. 사내 셋이 엉엉 우는 모습이 좀 우스꽝스러웠을지 모르지만, 마당에서 지켜보던 옥분이와 두 형수의 눈에서도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으니, 그날 저녁 그 집에 눈물 안 흘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돌쇠만이 마당 구석에서 조용히 서 있었지요. 그의 깊은 눈이 세 형제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에도 물기가 어려 있었지만, 돌쇠는 소매로 슬쩍 닦아내며 고개를 돌렸지요.
'이제 됐다. 이제 이 집안이 바로 섰다.'
태주가 돌쇠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큰형이 머슴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지요.
"돌쇠야, 아니, 돌쇠. 처음에 내가 너를 머슴이라고 깔봤다. 주둥아리라고 소리도 질렀고. 미안하다."
태봉도 옆에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나도 미안하다, 돌쇠.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셋 다 거지가 됐을 거다."
돌쇠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요.
"두 분 도련님, 저는 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방향만 가리켰을 뿐, 걸어가신 건 도련님들이십니다."
태평이 돌쇠의 어깨를 톡 쳤습니다.
"또 겸손이다. 돌쇠야, 네가 없었으면 나는 아직도 초가집에서 시래기죽 먹고 있었을 거다."
돌쇠가 피식 웃었지요. 보기 드문 환한 웃음이었습니다.
노을이 지고 별이 뜨고, 밤이 깊어갔습니다. 세 형제와 가족들이 마루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웃었지요. 최 부잣집이 다시 하나가 된 밤이었습니다. 아버지 최 영감이 살아 계셨다면 무릎을 치며 기뻐하셨을, 그런 밤이었습니다.
※ 8: 사람이 재산이다
그로부터 또 시간이 흘렀습니다. 세 형제의 살림은 안정되었고, 마을은 평화로웠지요. 큰형 태주는 노름을 끊고 성실한 장사꾼이 되었고, 둘째 태봉은 고을에서 장부를 가장 잘 다루는 사람으로 이름을 얻었습니다. 태평은 여전히 느긋하고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지만, 이제 아무도 그를 모자란 사람이라 부르지 않았지요.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버드내 마을의 버드나무에 연두색 새잎이 피어나고,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는 따스한 날이었지요. 태평이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데, 돌쇠가 다가와 조용히 말했습니다.
"도련님, 말씀 나눌 게 있습니다."
"왜, 무슨 일이냐?"
"자리를 좀 옮기시지요."
두 사람이 마을 뒷산 소나무 아래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산 아래로 마을 전체가 한눈에 보였지요. 기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들판에서 농부들이 일하고, 개울가에서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있었습니다.
돌쇠가 한참을 마을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지요.
"도련님, 저의 본래 이름은 돌쇠가 아닙니다."
태평이 돌쇠를 바라보았습니다. 돌쇠의 깊은 눈에 오랫동안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가 서려 있었지요.
"제 본명은 이달수입니다. 한양에서 골동품 장사를 하던 집안의 아들이었지요."
태평의 눈이 크게 떠졌습니다.
"골동품 장사라면, 그래서 네가 물건 보는 눈이."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도자기, 그림, 목기, 온갖 물건을 감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값어치가 얼마인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면 알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어쩌다 머슴이."
돌쇠, 아니 달수가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아버지가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했습니다. 평생 모은 재산을 통째로 빼앗기고, 빚까지 떠안았지요. 아버지는 충격으로 쓰러져 세상을 뜨셨고, 어머니도 그 뒤를 따르셨습니다. 저는 빚쟁이를 피해 야반도주했고, 이름을 바꾸고 이 마을로 흘러들어 와 머슴이 된 것입니다."
태평이 아무 말 없이 돌쇠의 이야기를 들었지요.
"머슴으로 살면서도 물건 보는 눈은 잊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빈손에 천한 신분으로는 그 눈을 쓸 곳이 없었지요. 그러다 도련님을 만났습니다."
돌쇠가 태평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깊은 눈에 처음으로 맑은 감정이 가득 차올랐지요.
"도련님이 저를 택하셨을 때, 솔직히 놀랐습니다. 금은도, 논문서도, 쌀독도 아닌 머슴을 택하다니. 미련한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태평이 피식 웃었지요.
"다들 그렇게 생각했지."
"그런데 도련님이 저한테 윗방을 내어주시고, 머슴이 아니라 식구라 하시고, 제 눈을 믿겠다 하셨을 때, 그때 결심했습니다. 이 분에게 내 평생의 재주를 쏟겠다고. 아버지한테 배운 것, 내가 겪은 것, 전부 다 쏟아부어서 이 분의 믿음에 보답하겠다고."
태평의 눈시울이 붉어졌지요.
"달수야."
"도련님, 제가 가진 건 물건을 보는 눈뿐이었습니다. 그건 혼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재주였지요. 물건을 알아봐도 살 돈이 없고, 팔 줄을 몰랐으니까요. 그런데 도련님은 저를 믿어주시고, 저한테 기회를 주셨습니다. 제 재주가 비로소 빛을 본 것은 도련님 덕분입니다."
태평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다. 나는 그냥 너를 믿었을 뿐이야. 대단한 것을 한 게 아니다."
"그냥 믿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것입니다, 도련님."
두 사람 사이에 봄바람이 불었지요. 소나무 가지가 사르르 흔들리고, 솔향이 코끝을 간지럽혔습니다.
태평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지요.
"달수야, 오늘부터 머슴은 그만두어라."
"예?"
"네가 머슴으로 들어온 건 형편 때문이었지, 네 됨됨이가 머슴이어서가 아니다. 이제 네 이름을 되찾아라. 이달수, 그 이름으로 살아라."
돌쇠, 아니 달수가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오랫동안 감춰왔던 이름을 되찾는다는 것이, 그것이 얼마나 벅찬 일인지. 달수의 눈에서 뜨거운 것이 한 줄기 흘러내렸지요.
"도련님."
"그리고 앞으로 나를 도련님이라 부르지 마라. 형이라 불러라."
"형님이라뇨. 제가 나이가 더 많습니다."
태평이 빙그레 웃었지요.
"그러면 내가 형님이라 부르겠다. 달수 형님."
달수가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윽고 소나무 아래에서 깊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고맙습니다, 태평 도련님. 아니, 태평아."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지요. 소나무 아래에서 두 사내가 웃는 모습이 봄볕에 따뜻하게 빛났습니다.
그 이야기는 마을에 퍼졌고, 고을에 퍼졌고, 먼 곳까지 퍼져나갔지요.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습니다.
"금은보화보다 사람이 재산이라더니, 막내가 그걸 알아본 거야."
"아무리 좋은 재물도 쓰는 사람이 못나면 소용없고, 아무리 빈손이어도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으면 일어서는 법이지."
"됨됨이를 알아보는 눈, 그게 진짜 복이여."
버드내 마을 이장이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꼭 이 말을 덧붙였다고 합니다.
"재산은 세 가지가 있느니라. 첫째는 눈에 보이는 재산이니 논밭과 금은이요, 둘째는 손에 쥔 재산이니 재주와 기술이요, 셋째는 가슴에 품는 재산이니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라. 첫째는 불에 타면 없어지고, 둘째는 늙으면 무디어지나, 셋째만은 죽을 때까지 빛이 바래지 않느니라."
세월이 더 흘렀지요. 태평의 머리에 흰 서리가 내리고, 달수의 등이 조금 굽어질 무렵, 두 사람은 여전히 버드내 마을 뒷산 소나무 아래에 나란히 앉아 마을을 내려다보곤 했습니다.
"달수 형님, 오늘 바람이 좋구먼."
"그래, 참 좋은 바람이다."
마을에서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가 올려 퍼졌습니다.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고, 버드나무가 바람에 하늘거렸지요.
태평이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그때 쌀독 대신 사람을 고른 것이, 평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구먼."
달수가 피식 웃었지요.
"나도 그때 도망가지 않은 것이 평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습니다. 주름이 깊어진 얼굴에 피어난 웃음이 봄볕보다 따뜻했지요.
바람이 불었습니다. 소나무 향을 머금은 따스한 봄바람이 두 사람의 흰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들었지요. 산 아래로 평화로운 마을이 펼쳐져 있었고, 들판에는 푸른 싹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재산이고, 믿음이 복이고, 됨됨이가 금은보화보다 귀하다는 것을 버드내 마을 사람들은 오래오래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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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 어떠셨나요? 형들이 금은과 논문서를 다투어 챙길 때 막내는 사람 하나를 골랐습니다. 미련해 보였던 그 선택이 무너진 집안을 다시 일으켰지요. 눈에 보이는 재산은 사라져도 사람을 알아보는 눈은 영원한 법입니다. 오늘 밤도 따뜻한 이불 속에서 편안히 잠드시길 바랍니다.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도 잊지 마세요. 다음 이야기에서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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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inematic wide shot of a traditional Korean village scene in warm golden hour light. In the foreground, a humble young man in simple white hanbok stands confidently beside a loyal older servant figure in worn brown clothes, both looking out over a vast landscape. Behind them on the left side, two richly dressed brothers clutch gold coins and land documents with greedy expressions, their fine clothes beginning to tatter and fade. On the right side, rolling green rice paddies and a prosperous village with tile-roofed houses glow under soft sunlight. A large old pine tree frames the composition from above. The contrast between material wealth crumbling and human bond enduring is visually represented through color temperature, warm amber tones surrounding the humble pair versus cold desaturated tones around the wealthy brothers. Korean Joseon dynasty aesthetic, painterly digital illustration style, atmospheric perspective, 16:9 aspect ratio, no t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