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반응형

    저승에서 친구 만난 가난뱅이

    태그 (15개)

    #조선야담, #저승사자, #염라대왕, #저승이야기, #한국전설, #오디오드라마, #잠드는이야기, #시니어콘텐츠, #청구야담, #인과응보, #환생, #조선시대전설, #옛날이야기, #권선징악, #민간설화
    #조선야담 #저승사자 #염라대왕 #저승이야기 #한국전설 #오디오드라마 #잠드는이야기 #시니어콘텐츠 #청구야담 #인과응보 #환생 #조선시대전설 #옛날이야기 #권선징악 #민간설화

     

     

    후킹멘트 (300자 이상)

    여러분, 혹시 어릴 적 가장 친했던 친구가 있으셨습니까? 같이 냇가에서 멱 감고, 한 그릇 밥을 나눠 먹던 그런 친구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친구를 죽어서야 다시 만났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저승 가는 캄캄한 길목에서 말이지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가 병들어 죽은 사내입니다. 저승 가는 길, 앞도 뒤도 보이지 않는 그 막막한 어둠 속에서 이 사내는 뜻밖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바로 삼십 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어린 시절 벗, 돌쇠의 목소리였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돌쇠가 저승에서 어마어마한 벼슬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돌쇠는 친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주었을까요? 그리고 이 가난뱅이 사내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게 되었을까요? 오늘 밤, 스르륵 잠드는 여담이 들려드리겠습니다.

    ※ 1: 가난뱅이 만복의 일생

    조선 숙종 임금이 다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충청도 청풍 땅, 금강 줄기가 산허리를 감아 도는 어느 산골 마을에 만복이라는 사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름은 만복. 만 가지 복이라. 참으로 넉넉하고 좋은 이름이었지요. 만복이의 할아버지가 손자를 처음 안아보고는 기뻐서 지어준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이름만큼이라도 복을 받고 살라고, 한평생 굶주림을 달고 산 노인이 갓난아기에게 줄 수 있는 건 그 이름뿐이었으니까요.

    허나 세상이라는 게 이름대로 되는 법이 없습니다. 만복이의 팔자는 이름과는 영 딴판이었지요. 만복이의 아비는 소작농이었습니다. 자기 땅이라곤 한 뙈기도 없이 남의 논을 빌려 농사를 지었는데, 한 해 농사를 지으면 절반을 소작료로 바치고, 나머지 절반에서 또 세금을 떼고 나면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만 남았습니다. 그나마 풍년이면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었지만, 흉년이 들면 나무껍질에 풀뿌리를 섞어 죽을 쑤어 먹어야 했습니다.

    만복이는 어려서부터 배고픔이 일상이었습니다. 한글 한 자 배울 겨를도 없이 들판을 뛰어다녔지요. 봄이면 진달래꽃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나물을 캤습니다. 냉이, 달래, 씀바귀. 어린 손으로 흙을 파 뿌리째 뽑아 소쿠리에 담았지요. 여름이면 아비를 따라 논에 나가 김을 맸습니다. 종아리까지 차오르는 논물 속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하루 종일 풀을 뽑으면, 해질 무렵에는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습니다. 가을이면 타작을 도왔고, 겨울이면 산에 올라 지게에 나무를 해다 날랐습니다. 나무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만복이의 등짝에는 열 살 때부터 지겟작대기 자국이 박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만복이에게 딱 하나, 이 세상에서 보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친구 돌쇠였습니다. 돌쇠는 만복이보다 한 살 아래였는데, 돌쇠네도 형편은 매한가지였지요. 돌쇠 아비 역시 소작농이었고, 돌쇠 어미는 남의 집 빨래와 삯바느질을 해서 겨우 반찬거리를 장만했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 둘이 만났으니, 가진 것은 없었지만 나눌 것은 많았습니다.

    두 아이는 여름이면 마을 앞 냇가에서 멱을 감고, 바지를 걷어붙이고 가재를 잡았습니다. 돌멩이를 들추면 가재가 집게발을 세우고 달아나는데, 돌쇠가 앞을 막으면 만복이가 뒤에서 낚아채고, 만복이가 놓치면 돌쇠가 다시 쫓는 식이었지요. 해가 기울면 둘은 논둑에 나란히 걸터앉아 잡은 가재를 세며 허황된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야, 만복아. 나 커서 한양 가서 큰 장사꾼 될 거다. 비단 장사, 인삼 장사, 뭐든 해서 큰돈을 벌 거야. 그때 되면 너한테 쌀 열 가마니 보내줄게."

    "에이, 그런 소리 말어. 니가 그러면 나는 벼슬을 해서 너한테 비단 보내줄게. 아니다, 벼슬 말고 큰 부잣집 사위가 될게. 그러면 처갓집에서 쌀이 들어올 테니까."

    두 아이는 깔깔거리며 웃었습니다. 배는 고팠지만, 둘이 함께 있으면 그 허기조차 잊을 수 있었으니까요. 돌쇠는 이 세상에서 만복이의 배고픔을 알아주는 유일한 친구였고, 만복이 역시 돌쇠에게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만복이가 열다섯이 되던 해 봄이었습니다. 돌쇠네 가족이 갑자기 마을에서 사라졌습니다. 돌쇠의 아비가 지주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해, 밤새 짐을 싸서 먼 고을로 야반도주를 한 것이지요. 만복이는 아침에 돌쇠네 빈집을 보고 한달음에 달려갔지만, 이미 집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솥도, 이불도, 돗자리도 없이 맨바닥만 남아 있었지요.

    "만복아, 나 간다."

    전날 저녁, 돌쇠가 논둑에서 만복이에게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는 나도 모르겄다. 아비가 오늘 밤 당장 떠나야 한다고 하셨어. 근데 만복아, 꼭 다시 만나자. 응?"

    "그래, 꼭이다. 약속이다."

    두 아이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습니다. 그게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그때는 아무도 몰랐지요.

    세월은 참으로 무심하게 흘렀습니다. 만복이는 스물에 이웃 마을 처녀에게 장가를 들고, 아비처럼 소작농이 되었습니다. 서른에 아들 하나를 낳아 삼돌이라 이름 붙이고, 마흔에 아내를 병으로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쉰에 허리가 굽기 시작했고, 예순이 넘으니 기침이 그치질 않았지요. 돌쇠 소식은 오십 년 세월 동안 풍문으로도, 전해 듣는 말로도, 단 한 번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혹 이 세상 사람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만복이는 가끔 논둑에 앉아 멀리 산 너머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했습니다.

    '돌쇠 그 녀석, 살아는 있는 거냐. 장사꾼이 되었을까. 잘 먹고는 사는 걸까.'

    산 너머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 2: 만복, 죽음을 맞이하다

    만복이가 예순다섯이 되던 해 겨울이었습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매서웠지요. 대한이 지나도 추위가 누그러지지 않았고, 밤이면 바람이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온 마을을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만복이네 초가집은 벽 틈마다 칼바람이 파고들어, 아궁이에 나무를 아무리 때도 방구들이 미적지근할 뿐 따뜻해지질 않았습니다.

    만복이의 기침은 가을부터 시작되었는데, 겨울이 깊어지면서 점점 심해졌습니다. 처음에는 마른기침이었지만, 어느 날부터 기침할 때마다 가래에 피가 섞여 나왔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타들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 사이가 쿡쿡 쑤셨고, 밤이면 식은땀이 이불을 적셨습니다.

    아들 삼돌이가 산 너머 읍내 약방까지 눈길을 헤치고 뛰어가 약을 지어왔습니다. 그러나 돈이 넉넉지 않으니 좋은 약재를 쓸 수가 없었지요. 인삼 한 뿌리면 좋으련만, 인삼 한 뿌리 값이 만복이네 일 년 소작료보다 비쌌으니 엄두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삼돌이가 아비 앞에 엎드려 눈물을 쏟았습니다.

    "아버지, 저를 두고 가시면 안 됩니다. 제가 뭘 해서든 약값을 마련하겠습니다. 봄만 되면 나을 겁니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세요."

    만복이는 마른 손으로 아들의 머리를 쓸어주며 힘없이 웃었습니다. 그 손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삼돌이 머리 위에 닿는 것인지 마는 것인지도 모를 지경이었지요.

    "삼돌아. 울지 마라. 사내가 눈물을 보이는 게 아니다. 이 아비가 살아생전 니한테 남겨줄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게 한스럽고 미안하구나. 니 어미한테도 못해준 게 태산인데, 아들한테까지 이 모양이니."

    삼돌이는 아비의 손등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그날 밤이었습니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 만복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누워 있는데, 방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습니다. 발자국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바람이 마당을 한 바퀴 돌다가 문 앞에 멈추는 것 같은, 사르르 하는 소리였지요. 개도 짖지 않았습니다. 온 마을이 잠든 고요 속에서, 그 소리만이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만복이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문틈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푸르스름한 빛이었습니다. 등잔불도, 달빛도 아닌, 이 세상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차가운 빛이었지요.

    '삼돌이가 등잔을 켠 건가.'

    만복이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방문이 스르르 열렸습니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문이 저절로 밀려났지요. 그리고 검은 도포를 입은 사내 셋이 방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키가 훤칠하고, 갓을 눌러 쓴 얼굴은 밀가루처럼 하얬습니다. 눈빛은 감정이라곤 없이 차갑고, 입술은 한 일자로 다물어져 있었지요.

    맨 앞의 사내가 품 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천천히 펼쳤습니다. 두루마리가 펼쳐지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렸습니다.

    "충청도 청풍 땅 만복이. 수명 예순다섯 해. 금일 자시가 마지막이니라."

    만복이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습니다.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오질 않았습니다.

    '아, 저승사자로구나. 내 죽을 때가 되었구나.'

    두 번째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서 일어나시오. 먼 길을 가야 하니 지체할 수 없소."

    만복이는 이불 끝자락을 움켜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한마디를 짜냈습니다.

    "사자 나리. 한 가지만, 딱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옆방에 제 아들놈이 자고 있는데, 그놈 얼굴 한 번만 보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세 번째 사내가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었습니다.

    "일각이 급하오. 이미 저승 장부에 이름이 올랐으니, 한시도 늦출 수 없소. 미련을 거두시오."

    만복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살아 있을 때는 몰랐습니다. 마지막 인사 한마디, 마지막 얼굴 한 번 보는 것이 이토록 간절한 것인 줄은. 한평생 가난해도 견딜 수 있었고, 아내를 보내고도 버텨냈건만, 아들에게 작별 인사조차 못 한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서러울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지요.

    그 순간이었습니다. 만복이의 몸에서 무언가가 스르르 빠져나갔습니다. 마치 젖은 무명옷을 벗는 것처럼, 가볍고도 서늘한 느낌이었지요. 고통도 없었습니다. 기침도 멈추었고, 갈비뼈의 통증도 사라졌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방구들 위에 자기 자신의 몸이 누워 있었습니다. 눈을 감고, 입을 반쯤 벌리고, 숨이 멎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불 위로 삐져나온 마른 손등에는 아직 삼돌이의 눈물 자국이 마르지 않은 채 남아 있었지요.

    '아, 나는 이제 정녕 죽은 것이로구나.'

    ※ 3: 저승 가는 캄캄한 길

    저승사자 셋을 따라 만복이는 걷기 시작했습니다. 집 마당을 나서자마자 세상이 확 달라졌습니다. 아까까지 분명 보이던 돌담도, 감나무도, 삼돌이가 쌓아놓은 장작더미도, 모두 안개 속으로 녹아 사라졌지요. 발밑에는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뿌연 것이 깔려 있었고, 머리 위에는 하늘도 별도 달도 없이 끝없는 어둠만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앞을 봐도 검고, 뒤를 봐도 검고, 옆을 봐도 온통 어둠뿐. 만복이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곤 앞에서 걸어가는 저승사자 셋의 검은 도포 자락뿐이었습니다. 그 도포 자락이 바람도 없는데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이 묘하게 으스스했지요.

    만복이는 두려웠습니다. 발이 땅을 디디는 것 같으면서도 디디지 않는 것 같은 묘한 감각이었습니다. 딱딱한 흙바닥도 아니고, 물렁물렁한 진흙도 아닌, 마치 솜 위를 걷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발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걷는 것인지 떠가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지요. 시간의 감각도 없어졌습니다. 한 시진을 걸은 것 같기도 하고, 하루를 걸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눈 깜짝할 사이였는지도 모릅니다.

    만복이가 용기를 내어 앞서가는 저승사자에게 물었습니다.

    "사자 나리, 저승까지는 얼마나 걸립니까."

    맨 앞의 저승사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오. 생전에 지은 업에 따라 길이 달라지는 법이니, 쓸데없이 묻지 말고 가만히 따라오시오."

    만복이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걸었습니다. 업에 따라 길이 달라진다. 그 말이 가슴에 무겁게 내려앉았습니다.

    '내가 지은 업이라고는 가난하게 산 것밖에 없는데, 이 길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한참을 걸었을 때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길 양쪽으로 희미한 불빛이 점점이 떠 있었는데, 등잔불도 아니고 반딧불이도 아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니, 불빛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람의 형상을 한 혼백들이었지요.

    남녀노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혼백이 길가에 쪼그려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소리 없이 울고 있었고, 어떤 이는 아무런 표정 없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여인도 있었고, 흰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도 있었습니다. 한결같이 길가에 주저앉아, 갈 곳을 잃은 것처럼 보였지요.

    '저 사람들은 다 무엇이냐. 저승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여기서 뭘 하는 거냐.'

    만복이가 무서운 마음에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재촉하는데, 갑자기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만복이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습니다. 꽤 힘이 세었습니다. 만복이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습니다.

    "으악! 누, 누구냐!"

    "쉿. 조용히 해. 목소리 낮춰."

    낮고 굵은 목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그 목소리에서 저승 길의 으스스함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마치 오랜만에 화롯불 앞에 앉은 것처럼, 어딘가 편안하고 그리운 느낌이었지요. 만복이는 어둠 속에서 자기 소매를 잡아당긴 존재를 바라보았습니다.

    검은 관복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습니다.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허리에는 넓은 대를 둘렀는데, 저승사자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습니다. 저승사자들이 차갑고 무표정했다면, 이 사내의 눈에는 묘한 웃음기가 서려 있었지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고, 무엇보다 눈빛이 맑았습니다. 저승 길 한복판에서 그런 맑은 눈빛이라니, 그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설마, 만복이 아니냐?"

    만복이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아니, 혼백에게 심장이 있을 리야 없었지만, 그만큼 놀랐다는 뜻입니다. 그 목소리. 그 말투. 오십 년 세월이 흘렀건만, 만복이의 귀는 단번에 알아들었습니다. 마치 몸에 배인 습관처럼, 잊은 줄 알았는데 잊히지 않은 목소리였지요.

    "돌, 돌쇠냐? 돌쇠 이 녀석이냐?"

    "하하, 이 바보야. 그래, 나다. 나, 돌쇠."

    만복이는 그 자리에서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캄캄한 저승 길 한복판에서, 오십 년 만에, 그것도 둘 다 이미 죽은 몸으로, 어린 시절의 벗을 다시 만나다니. 이것이 가능한 일이란 말입니까. 만복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혼백도 울 수 있는 것인지, 뜨거운 것이 뺨을 타고 흘렀습니다.

    "이 녀석아. 니가 여기서 뭘 하는 거냐. 너도 죽었단 말이냐."

    돌쇠가 빙그레 웃었습니다. 냇가에서 가재를 잡던 그때 그 웃음이었습니다.

    "죽었지. 나는 너보다 삼십 년도 더 전에 죽었다."

    ※ 4: 염라대왕이 된 돌쇠

    만복이는 멍하니 돌쇠를 바라보았습니다. 삼십 년 전에 죽었다. 그 말이 만복이의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돌쇠가 서른다섯에 세상을 떠났다면, 만복이가 서른다섯이던 해. 그해가 어떤 해였는지 만복이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들 삼돌이가 다섯 살이던 해, 아내가 삼돌이 손을 잡고 처음으로 마을 장에 데려간 해. 그때 만복이는 논둑에 앉아 혹시 돌쇠한테서 소식이 올까, 지나가는 보부상에게 전라도 쪽 소식을 물어본 적이 있었지요. 아무도 모른다고 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그때 이미 돌쇠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이 녀석아. 그래 어디서 어찌 살다가 죽은 거냐."

    돌쇠가 잠시 침묵했습니다. 관복 아래로 어깨가 한 번 가볍게 떨린 것 같았지요. 그 얼굴에 잠깐 그늘이 지나갔습니다.

    "아비를 따라 전라도 남원 땅까지 내려갔다. 거기서도 남의 논에 붙어 농사를 짓긴 했는데, 우리 팔자가 어디를 가도 변하냐. 흉년이 세 해나 이어지더라. 스물다섯에 장가도 못 가고, 서른에 아비를 보내고, 혼자 남아서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는데, 서른다섯 겨울에 굶어 죽었다."

    만복이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몸이 앞으로 기우뚱했지요.

    "굶어 죽었다고? 이 녀석아, 어째서 나한테 소식이라도 안 보냈냐. 내가 쌀 한 말이라도, 보리쌀이라도 보냈을 거 아니냐."

    "니가 보낼 쌀이 어디 있었냐."

    돌쇠가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나는 알았다. 니도 나만큼이나 가난했을 거라는 거. 니한테 짐 지우기 싫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소식을 보낼 방법도 없었다. 글을 모르니 편지를 쓸 수도 없고, 사람을 보내자니 그럴 형편도 안 되고. 결국 아무것도 못 한 채 죽어버린 거지."

    둘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습니다. 저승 길 한복판에서, 두 사내가 오십 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순다섯 노인의 모습이고, 하나는 서른다섯 장정의 모습 그대로였지요. 죽은 나이 그대로 멈춰버린 것입니다. 만복이 눈에는 돌쇠가 여전히 젊어 보였고, 돌쇠 눈에는 만복이가 세월의 무게를 온몸에 짊어진 채 서 있었습니다.

    만복이가 소매 끝으로 눈물을 닦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런데 돌쇠야. 니가 입고 있는 그 옷은 뭐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관복 아니냐."

    돌쇠가 자신의 검은 관복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소매가 넓고, 가슴팍에 무언가 수놓아져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이 났지요.

    "이게 말이냐. 만복아, 니가 놀랄 소리를 해줄게."

    "뭔데?"

    "나 지금 저승에서 벼슬을 하고 있다."

    "뭐라고?"

    "그것도 아무 벼슬이 아니라, 염라대왕전 판관이다. 염라대왕 옆에서 죽은 사람들의 죄를 따지고 환생을 정하는 벼슬이야."

    만복이는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눈이 휘둥그래져서 돌쇠를 위아래로 훑어보았지요. 돌쇠가, 같이 코 흘리며 가재 잡던 그 돌쇠가, 글 한 자 모르던 그 돌쇠가, 저승에서 판관 벼슬을 하고 있다니. 이건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습니다. 아, 이미 죽은 몸이니 꿈일 리야 없었지요.

    "아니, 니가 어째서 그런 큰 벼슬을 하고 있는 거냐. 니가 이승에서 관가 근처에도 못 가봤잖냐."

    돌쇠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죽고 나서야 알았다. 이승에서의 벼슬이란 게 돈과 집안과 뒷배로 하는 것이지만, 저승에서의 벼슬은 오로지 마음씀씀이로 하는 거더라."

    "마음씀씀이?"

    "그래. 나는 이승에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땅도 없고, 집도 없고, 돈도 없었지. 하지만 남을 속인 적이 없었다. 남의 것을 탐한 적도 없었고. 굶으면서도 옆에 나보다 더 굶는 사람이 있으면 내 것을 나눠줬다. 남원에서 혼자 살 때, 옆집에 홀어미가 어린애 셋을 데리고 있었는데, 내가 죽을 쑤면 반은 꼭 그 집에 갖다줬어. 나도 굶는 판에 말이다."

    돌쇠가 먼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그게 저승에서는 큰 공덕이었던 게지. 업경대라고 있어. 거울 같은 건데, 사람이 이승에서 한 일이 낱낱이 다 비치거든.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무도 안 보는 데서 한 일도 전부 다. 거기에 나쁜 짓이 없고 착한 일만 가득하니까, 염라대왕께서 나를 가까이 두시고 판관으로 앉히신 거다."

    만복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문득 제 처지가 생각났습니다. 자기는 이제 저승으로 끌려가 심판을 받을 몸이 아닙니까. 업경대 앞에 서면 자기 일생이 낱낱이 비칠 텐데, 그 거울에 비칠 것이라곤 가난과 고생뿐일 터. 혹시 모르는 사이에 지은 죄라도 있으면 어찌 되는 것인지,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돌쇠야. 나는 어찌 되는 거냐. 나도 이제 염라대왕 앞에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하는 거냐. 솔직히 무섭다."

    돌쇠가 만복이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잡았습니다. 혼백의 손인데도 단단하고 힘이 있었지요.

    "만복아. 그래서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니 수명장부에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걸 미리 봤어. 그래서 저승 길목에 일부러 나온 거야. 판관이 함부로 자리를 비우면 안 되는 건데, 니를 만나려고 몰래 빠져나왔다."

    만복이는 눈이 시큰거렸습니다. 오십 년 전, 논둑에서 새끼손가락을 걸고 한 약속. 꼭 다시 만나자던 그 약속을, 돌쇠는 이승도 아닌 저승에서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돌쇠야."

    "응."

    "고맙다. 니 같은 놈이 내 친구여서 진짜로 고맙다."

    "바보 같은 소리 마라. 아직 고마워할 때가 아니야. 내가 할 말이 더 남았다."

    ※ 5: 돌쇠가 전한 이승의 비법

    돌쇠가 만복이의 손목을 잡아끌었습니다. 저승 길가의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기자, 주위가 한결 고요해졌지요. 앞서가던 저승사자 셋은 어느새 멈춰 서 있었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던 길을 멈추다니 이상한 일이었지요. 만복이가 눈을 둥그렇게 떠서 바라보니, 돌쇠가 손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그었습니다. 글자 같기도 하고, 부적의 무늬 같기도 한 것이 푸른빛으로 반짝이더니 스르르 사라졌습니다.

    "걱정 마라. 내가 잠깐 세워뒀다. 저승사자들의 발을 묶어둔 거야. 판관의 권한이라는 게 이럴 때 쓰는 거지. 오래는 안 되지만, 니하고 이야기할 시간은 충분하다."

    만복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쇠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승에서 쥐뿔도 없던 녀석이 저승에서는 저승사자까지 멈춰 세울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니, 세상 일이란 참으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돌쇠가 만복이를 바위 위에 앉히고는, 자기도 옆에 걸터앉았습니다. 마치 어릴 때 논둑에 나란히 앉던 것처럼. 돌쇠가 입을 열었습니다.

    "만복아. 단도직입으로 말할게. 니 수명장부를 내가 봤다."

    "내 수명장부?"

    "그래. 염라대왕전에 사람마다 장부가 있어. 이름, 태어난 날, 죽는 날, 그리고 이승에서 지은 업이 낱낱이 적혀 있지. 니는 원래 예순다섯에 죽게 되어 있었고, 그대로 죽었다. 수명대로 산 거야. 하지만."

    돌쇠가 잠시 말을 끊고 만복이의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니 업경대를 내가 미리 들여다봤다. 판관이니까 열람할 수 있거든. 만복아, 니도 나처럼 큰 죄가 없더라."

    만복이는 멋쩍게 웃었습니다. 입꼬리가 씁쓸하게 올라갔지요.

    "죄를 지을 만한 재주도, 기회도 없었으니까. 훔칠 만큼 남의 집에 가까이 가본 적도 없고, 속일 만큼 사람을 많이 만나본 적도 없으니."

    "아니, 그게 아니다."

    돌쇠의 목소리가 단호해졌습니다.

    "니는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고 있는데, 저승에서 보면 전혀 다르다. 만복아, 니는 가난해도 남의 것을 훔치지 않았다. 배가 고파도 남의 밥을 빼앗지 않았고, 서럽고 억울해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다. 아내가 죽었을 때도, 홀로 아들을 키울 때도, 니는 단 한 번도 하늘을 탓하거나 남을 미워한 적이 없어. 삼돌이를 키우면서 쌀이 떨어지면 자기는 굶고 아들 입에 먼저 밥을 넣어줬지. 겨울에 이불이 하나밖에 없으면 아들한테 덮어주고 니는 짚더미 속에서 잤잖아."

    만복이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게 뭐 대단한 거냐. 자식한테 밥 먹이고 이불 덮어주는 건 아비라면 누구나 하는 일 아니냐."

    "바로 그거다."

    돌쇠가 만복이의 무릎을 탁 쳤습니다.

    "누구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누구나 하는 일이 아니거든. 저승에 와보면 알아. 배가 고프면 남의 것에 손을 대는 사람이 태반이고, 서러우면 세상을 저주하는 사람이 허다하다. 가난이 사람을 비뚤어지게 만드는 건 순식간인데, 니는 평생 가난해도 비뚤어지지 않았어. 하루하루를 사람답게 살아내는 것. 그게 이승에서 가장 어렵고, 저승에서 가장 크게 쳐주는 공덕이야."

    만복이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것들이, 죽고 나니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지요.

    돌쇠가 주위를 한 번 살폈습니다. 저승사자 셋이 여전히 멈춰 서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목소리를 한 층 더 낮추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 가지 방도를 마련했다. 염라대왕께 아뢰었더니, 니를 특별히 이승으로 되돌려 보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뭐라고? 나를 살려 보내준다고? 이미 죽은 사람을?"

    "그래. 업경대에 비친 니 일생이 깨끗하니까 가능한 거다. 아무나 되는 게 아니야. 단, 조건이 있다."

    만복이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혼백인데도 목구멍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지요.

    "이승에 돌아가면, 니 마을 뒷산 느티나무 밑을 파라. 나무 밑동에서 왼쪽으로 다섯 걸음, 거기를 석 자 깊이로 파면 항아리가 하나 묻혀 있다. 큰 놈이다. 옛날 임진년 난리 때 어느 부잣집이 피란을 가면서 금은을 몽땅 담아 묻어놓은 건데, 주인은 전쟁통에 왜적의 칼에 죽고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아무도 그 항아리를 파러 오지 못했어. 이승에서는 아무도 모르고, 저승 장부에만 기록이 남아 있지."

    만복이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꿈같은 소리였지요.

    "그, 그걸 내가 파내도 되는 거냐. 아무리 주인이 죽었다 해도 남의 재물 아니냐. 나 같은 놈이 그걸 가지면 도적질하는 거 아니냐."

    돌쇠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다. 주인은 이미 저승에서 환생했다. 지금은 다른 고을에서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어. 이번 생에는 전혀 다른 인연이니, 전생의 재물과는 인연이 끊어진 거나 마찬가지다. 염라대왕께서도 이 재물은 임자 없는 것이니 공덕 쌓을 사람에게 가는 것이 옳다고 허락하셨다. 아무 탈이 없을 거야."

    만복이는 가슴이 쿵쿵 뛰었습니다. 평생 쌀 한 가마 제대로 가져본 적 없는 사내에게, 금은이 가득 든 항아리라니. 꿈에서도 꿔본 적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때 돌쇠가 만복이의 두 손을 잡으며 표정을 단단하게 굳혔습니다. 웃음기가 사라지고, 눈빛이 깊어졌지요.

    "대신 약속해라, 만복아."

    "뭘?"

    "그 재물을 니 혼자만 쓰지 마라. 절대로. 마을에 굶는 사람이 있거든 밥을 먹여라. 아이들이 글을 배우지 못하거든 서당을 열어라. 비가 오면 개울물이 불어 건너지 못하는 사람이 있거든 다리를 놓아라. 병든 노인이 약을 못 구하거든 약값을 대주어라. 니가 베푼 만큼 니 수명이 늘어난다. 선행 하나에 한 해씩, 업경대에 기록이 쌓이는 거다."

    돌쇠가 만복이의 손을 더 세게 쥐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니가 그 재물을 니 혼자만 배불리 쓰거나, 욕심에 눈이 멀어 원래의 마음을 잃으면, 그때는 내가 직접 데리러 간다. 판관이 직접 데리러 가면 돌이킬 수 없어. 알겠냐."

    만복이는 돌쇠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알겠다. 약속한다. 돌쇠야, 내 이 나이 먹도록 살면서 느낀 게 하나 있다. 혼자 배부른 건 배부른 게 아니더라. 옆에 굶는 사람이 있으면 밥맛이 없어. 그건 니도 알잖냐."

    돌쇠가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래, 니가 그런 놈이니까 내가 이러고 있는 거지."

    ※ 6: 다시 이승으로

    만복이는 돌쇠의 두 손을 꽉 잡았습니다. 혼백의 손인데도 따뜻했습니다. 살아 있을 때 잡았던 그 거친 손바닥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지요. 아니, 어쩌면 우정이라는 것이 체온보다 더 뜨거운 온기를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돌쇠야. 고맙다. 진짜로 고맙다. 니가 아니었으면 나는 그냥 저승으로 끌려가서 끝이었을 거다."

    "고마워할 거 없다. 니가 나한테 해준 거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만복이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내가 니한테 뭘 해줬냐. 아무리 생각해도 해준 게 없는데. 같이 놀아준 거밖에 더 있냐."

    돌쇠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저승 길의 하늘은 캄캄했지만, 돌쇠의 눈에는 먼 옛날의 풍경이 비치고 있는 듯했지요.

    "기억 안 나냐? 내가 열 살 때 겨울."

    "열 살 때?"

    "그해 겨울이 유난히 추웠잖아. 눈이 허리까지 왔고. 우리 집은 아궁이에 넣을 나무도 떨어져서 온 식구가 이불 속에서 벌벌 떨고 있었어. 삼 일째 굶고 있었다. 아비는 어디 품팔이라도 가겠다고 나갔다가 눈에 갇혀서 이틀째 돌아오지 않았고."

    만복이의 눈이 서서히 커졌습니다. 기억이 났습니다. 아주 오래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이.

    "그날 저녁때 니가 우리 집에 왔다. 손에 보리밥 한 그릇을 들고. 니네 집에 보리밥이 딱 한 그릇밖에 없었잖아. 니 저녁밥이었는데, 니 어미가 니 먹으라고 지어놓은 건데, 니가 그걸 들고 눈길을 헤치고 우리 집까지 왔어."

    만복이는 기억났습니다. 그날 저녁, 어미가 남은 보리쌀을 긁어모아 밥 한 그릇을 지어놓았었지요. 그런데 돌쇠네가 삼 일째 굶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밥그릇을 들고 눈밭을 뛰어간 것이었습니다. 어미한테 한 대 맞을 각오를 하고서. 열 살짜리 아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뿐이었으니까요.

    "니가 문 앞에 서서 뭐라고 했는지 아냐?"

    "뭐라고 했더라."

    "이거 먹어. 나는 아까 고구마 먹었으니까 배 안 고파. 그렇게 말했어. 근데 만복아, 나는 알았다. 니가 고구마를 안 먹었다는 거. 니 입에서 고구마 냄새가 안 났거든. 니도 굶고 있었던 거잖아."

    만복이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일을 돌쇠가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자기가 거짓말을 한 것까지 돌쇠가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지요.

    "그 보리밥 한 그릇이 내 목숨을 살렸다. 삼 일을 굶은 몸에 밥 한 술이 들어가니까 겨우 기운이 났고, 다음 날 아비가 돌아와서 어떻게든 겨울을 넘겼지. 니가 그 밥을 안 줬으면 나는 그 겨울에 죽었을 거다. 서른다섯까지도 못 살고 열 살에 죽었을 거야."

    돌쇠가 말을 이었습니다.

    "니 덕에 스물다섯 해를 더 살았다. 그 스물다섯 해 동안 내가 이웃에게 베푼 작은 선행들이 하나하나 쌓여서, 업경대에 기록이 됐고, 결국 저승에서 판관 벼슬까지 하게 된 거다. 만복아, 니가 열 살 때 건넨 보리밥 한 그릇이, 저승에서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줬어. 니는 몰랐겠지만, 니 선행 하나가 이렇게 큰 나비가 되어 돌아온 거야."

    만복이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보리밥 한 그릇. 살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 작은 일이, 저승에서는 이토록 거대한 이야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승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열 살짜리의 마음이, 저승의 장부에는 금빛 글자로 기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돌쇠가 품에서 작은 부적 하나를 꺼냈습니다. 노란 종이에 붉은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글자라기보다는 부호에 가까운 것이 빛을 내고 있었지요. 돌쇠가 그것을 만복이의 손바닥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습니다.

    "자, 이걸 쥐고 눈을 감아라. 내가 셋을 세면 정신이 아득해질 거야. 그리고 눈을 뜨면 니 몸으로 돌아가 있을 거다."

    만복이가 부적을 쥔 손이 떨렸습니다.

    "다만 명심해라. 이승에 돌아가면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마라. 물만 마셔. 저승의 기운이 몸에서 빠지려면 사흘이 걸리거든. 그 전에 밥을 먹으면 저승의 기운과 이승의 기운이 뒤엉켜서 탈이 난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해가 뜨거든 그때 뒷산으로 가라."

    만복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적을 꽉 쥐었습니다. 그리고 돌쇠에게 물었습니다.

    "돌쇠야.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겠냐? 이번에는 진짜로."

    돌쇠가 웃었습니다. 어릴 때 냇가에서 가재를 잡고 깔깔거리던 것과 똑같은 웃음이었습니다. 오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돌쇠만의 웃음.

    "만나고말고. 이번에는 서두르지 마라. 니 할 일 다 하고, 아들 장가 보내고, 손자 얼굴까지 보고, 마을 사람들한테 칭찬도 실컷 듣고, 그러고 나서 천천히 와.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이번에는 저승 길목이 아니라, 좋은 데서 만나게 해줄게."

    만복이는 부적을 쥔 채 눈을 감았습니다. 돌쇠가 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

    "둘."

    "셋."

    그 순간, 온몸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승 길의 어둠이 소용돌이치더니,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쳤습니다. 그리고 코끝에서 무언가 익숙한 냄새가 났습니다. 숯내. 아궁이 타는 냄새. 된장 끓이는 냄새. 이승의 냄새였지요.

    "아버지! 아버지! 숨을 쉰다! 아버지가 살아나셨다!"

    삼돌이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습니다. 만복이는 간신히 눈을 떴습니다. 천장이 보였습니다. 갈라진 흙벽과 그을린 서까래와, 벽에 걸린 낡은 삿갓. 보잘것없는 초가집 천장이었지만, 그 순간 만복이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삼돌이가 아비의 손을 잡고 펑펑 울고 있었습니다. 그 따뜻한 손의 감촉이, 만복이를 이승으로 단단히 붙들어매고 있었지요.

    '돌쇠야. 돌아왔다. 내가 돌아왔어.'

    만복이가 꽉 쥔 왼손을 펴보니, 손바닥 한가운데에 부적이 놓여 있었습니다. 노란 종이에 붉은 글씨. 꿈이 아니었습니다.

    ※ 7: 가난뱅이, 마침내 부자가 되다

    만복이는 돌쇠의 말대로 사흘을 꼬박 굶었습니다. 삼돌이가 미음을 쑤어오면 고개를 젓고, 죽을 끓여오면 손을 내저었지요. 물만 한 모금씩 받아 마셨습니다. 삼돌이는 기가 막혀서 안절부절했습니다.

    "아버지, 죽다 살아나신 분이 밥을 안 잡수시면 어찌합니까. 기력이 떨어지면 또 쓰러지십니다."

    "삼돌아. 아비 말 들어라. 사흘만 참으면 된다. 사흘 뒤면 다 괜찮아진다."

    삼돌이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죽었다 살아난 아비의 눈빛이 하도 단호해서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했습니다. 다만 밤새 아비 곁을 지키며 혹시라도 또 숨이 멎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지요.

    사흘째 되는 날 새벽이었습니다. 만복이는 눈이 먼저 떠졌습니다. 창호지 너머로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지요. 만복이는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사흘을 굶었는데도 몸에 기운이 돌았습니다. 기침도 멈추어 있었고, 갈비뼈 사이의 통증도 사라져 있었습니다. 마치 십 년은 젊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동쪽 하늘에 해가 떠올랐습니다. 붉은 해. 이승의 해. 만복이는 방문을 열고 마당에 섰습니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폐 속으로 가득 들어왔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이토록 감사한 일인 줄, 예순다섯 해를 살면서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삼돌아, 일어나라. 나하고 뒷산에 가자."

    삼돌이가 잠결에 벌떡 일어났습니다.

    "뒷산이요? 아버지, 갑자기 뒷산은 왜요?"

    "묻지 말고 삽 하나 챙겨서 따라와라."

    삼돌이가 반신반의하면서도 외양간 옆에서 삽을 들고 따라나섰습니다. 만복이는 뒷산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을 성큼성큼 걸었습니다. 사흘 전까지 기침에 피를 토하던 사람이라곤 믿기 어려운 걸음걸이였지요. 삼돌이가 뒤에서 헐떡거리며 쫓아왔습니다.

    마을 뒷산 느티나무는 수백 년은 되었을 법한 거목이었습니다. 줄기가 어른 서넛이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을 만큼 굵었고,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여름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그 그늘 아래서 쉬어가곤 했지요. 만복이는 나무 밑동에서 왼쪽으로 다섯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여길 파라. 석 자 깊이로."

    삼돌이가 의아한 얼굴로 삽을 들었습니다. 한 자, 두 자, 파 내려가니 흙 속에서 돌멩이와 나무뿌리가 걸렸습니다. 그것을 걷어내고 다시 한 자를 더 파내려가자, 삽 끝에 딱,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친 것이지요. 만복이의 심장이 쿵쿵 뛰었습니다.

    "더 파라. 조심해서."

    삼돌이가 삽 대신 손으로 흙을 걷어냈습니다. 갈색 흙 속에서 검은 항아리의 윤곽이 드러났습니다. 꽤 큰 놈이었습니다. 두 팔로 안아야 할 만한 크기였지요. 삼돌이가 힘을 주어 항아리를 끌어올리고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 순간, 삼돌이의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아, 아버지! 이게 뭡니까!"

    항아리 안에는 금괴와 은자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아침 햇살에 번쩍번쩍 빛나는 금빛이 눈을 찔렀지요. 평생 엽전 한 닢 넉넉히 가져본 적 없는 부자, 아니, 아들이 그 광경에 벌벌 떨었습니다.

    "어찌, 어찌 아신 겁니까. 이게 정녕 금덩이입니까."

    만복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먼 산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습니다.

    "돌쇠야. 니 말이 맞았다."

    그날부터 만복이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비단옷도, 기와집도, 산해진미도 아니었습니다. 만복이는 돌쇠와의 약속을 단 하루도 잊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마을에 쌀을 푸는 것이었습니다. 그해 겨울, 만복이처럼 가난한 집이 한둘이 아니었지요. 굶주리던 이웃들이 만복이 덕에 봄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듬해 봄에는 마을 앞 개울에 돌다리를 놓았습니다. 비만 오면 물이 불어서 아낙네와 아이들이 건너지 못하던 그 개울에 반듯한 돌다리가 놓이자, 마을 사람들이 눈물을 글썽였지요. 그 다음 해에는 서당을 열었습니다. 한글도 한문도 모르는 아이들이 처음으로 글을 배웠고, 훗날 그중에서 과거에 급제한 아이도 나왔다고 합니다. 병든 노인에게는 약값을 대주었고, 장가 못 가는 총각에게는 혼수를 마련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만복이 영감이 환골탈태를 했어. 죽다 살아나더니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어."

    "아무리 그래도, 저 재물이 대체 어디서 난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고, 시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복이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소문이야 어떻든, 자기가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세월이 흘렀습니다. 삼돌이는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았고, 만복이는 마침내 손자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손자를 처음 안아본 날, 만복이는 아이의 볼을 어루만지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돌쇠야. 니가 보라 한 것 다 봤다. 아들 장가도 보냈고, 손자 얼굴도 봤고. 이만하면 됐지?"

    예순다섯에 끝날 뻔했던 수명이, 어느덧 여든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십오 년. 돌쇠가 말한 대로, 선행을 쌓을 때마다 수명이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지요.

    여든하나가 되던 해 가을이었습니다. 온 산에 단풍이 불타듯 물들었습니다. 느티나무 잎도 노랗게 변해, 바람이 불 때마다 금빛 잎사귀가 우수수 떨어졌지요. 만복이는 그날 저녁 마루에 나와 앉아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붉은 노을이 산 너머로 번지고, 하늘과 산 사이가 온통 주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바람결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주 멀리서, 그러나 또렷하게.

    "만복아. 이제 올 때 됐다."

    만복이는 빙그레 웃었습니다. 무섭지 않았습니다. 예순다섯에 저승사자가 왔을 때는 온몸이 떨렸건만, 이번에는 마치 오래 기다리던 손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돌쇠야. 기다렸다. 약속 다 지켰으니, 이제 가자."

    삼돌이가 다음 날 아침 방문을 열었을 때, 만복이는 이불 위에 반듯이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숨은 멎어 있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나러 가는 사람의 얼굴처럼, 편안하고 따뜻한 미소였지요.

    마을 사람들은 만복이의 장례를 치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복이 영감은 죽어서도 웃고 갔으니, 저승에서도 좋은 데로 가셨을 거야."

    그리고 그날 밤, 마을 뒷산 느티나무 아래에서 이상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무 아래 지나가던 나그네가 보았는데, 두 사내가 나란히 앉아 무언가를 이야기하며 깔깔거리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한 사람은 노인이었고, 한 사람은 젊은이였는데, 둘 다 어찌나 즐거워 보이던지 나그네가 가까이 가보았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었고, 다만 바람에 느티나무 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어서 가져가는 것은 금도 아니요, 은도 아니요, 땅도 아니요, 벼슬도 아닙니다. 사람이 죽어서 가져가는 것은 오직, 살아 있는 동안 베푼 마음씀씀이와 사람 사이의 정뿐이지요. 만복이와 돌쇠가 그러했듯, 보리밥 한 그릇의 마음이 저승까지 이어지고, 그 마음이 다시 이승의 운명을 바꾸기도 하는 법입니다.

    배가 고프면 곁에 더 고픈 사람을 찾아보십시오. 주머니가 비면 곁에 더 빈 사람을 찾아보십시오.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될 때, 보리밥 한 그릇이라도 건넬 수 있는 손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승에서 쌓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이 아니겠습니까.

    유튜브 엔딩멘트 (300자 이내)

    오늘 이야기 어떠셨습니까. 보리밥 한 그릇이 저승에서 벼슬이 된다니, 참으로 신기하지요. 살아생전 작은 선행 하나가 저승 업경대에 다 기록된다 하니, 내일부터라도 옆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보시는 건 어떨까요. 다음 이야기도 기대해 주시고, 구독과 좋아요 꾹 눌러주시면 더 재미난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썸네일 이미지 프롬프트 (영어, 16:9, no text)

    A cinematic dark atmospheric scene on the road to the Korean afterlife, two ghostly figures standing face to face in dense fog, one wearing a tattered commoner hanbok and the other dressed in a black Joseon-era official gat hat and dark magistrate robes, a faint warm golden glow between them symbolizing friendship, eerie bluish mist surrounding the path, distant traditional Korean lanterns floating in the darkness, volumetric lighting, dramatic chiaroscuro, Korean folklore fantasy art style, moody and emotional, 16:9 aspect ratio, no text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