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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밤, 신부가 옷고름을 풀지 않고 내건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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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가난한 관아 서리의 허름한 단칸방에 시집온 아리따운 새색시. 합방을 앞둔 첫날밤,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할 신부가 옷고름을 단단히 여미며 충격적인 제안을 건넵니다. "서방님, 딱 삼 년입니다. 삼 년간 저와 거처를 따로 쓰시며 제 말씀대로만 살아주십시오." 달콤해야 할 첫날밤을 미루고 아내가 꾸민 기막힌 큰 그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 1: 옷고름을 여미는 신부
희뿌연 보름달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던 늦은 밤, 한양 도성 변두리에 자리한 허름한 초가집 단칸방에는 묘하고도 무거운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찬 바람이 새어 들어올 듯 얇고 낡은 창호지 문풍지가 바르르 떨렸고, 방 한가운데 놓인 촛대에서는 아슬아슬하게 불꽃이 일렁이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벽면에 길게 늘어뜨렸다. 선혜청에서 말단 서리로 일하며 쥐꼬리만 한 녹봉으로 하루하루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하며 살아가던 노총각 김 서방. 그는 오늘, 평생 짝을 찾지 못해 고독하게 늙어갈 줄만 알았던 자신의 인생에 기적처럼 찾아온 아리따운 여인과 천신만고 끝에 혼례를 올렸다.
비록 남들처럼 번듯한 기와집 마당에서 고기를 굽고 풍악을 울리는 성대한 잔치도 차리지 못했고, 그저 정화수 한 그릇을 떠다 놓고 올린 눈물겹게 조촐한 혼례였지만, 김 서방의 가슴은 터질 듯이 벅차올랐다. 방 아랫목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새색시의 자태는 도성의 그 어떤 고관대작 집안의 규수보다도 곱고 단아했다. 싸구려 명주로 대충 지어 입은 혼례복조차 그녀의 기품을 가리지 못했다. 김 서방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얇은 요와 이불이 깔린 방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가난뱅이 신세를 면치 못하는 자신에게 이토록 참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지어미로 와주다니,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환희가 밀려왔다.
"부인... 이리도 누추하고 찬 바람이 부는 곳으로 시집오게 하여 지아비로서 참으로 면목이 없소. 비록 지금은 비가 새는 낡은 초가집에 불과하지만, 내가 앞으로 평생 당신 손에 물 한 방울, 흙 한 줌 묻히지 않게 애지중지 아껴주리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당신 하나만큼은 배곯지 않게 지켜주겠소."
떨리고 투박한 목소리로 진심을 고백한 김 서방은 굳은살이 깊게 배인 거친 손을 조심스럽게 뻗었다.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신부의 족두리를 벗겨내고, 붉은빛이 감도는 고운 뺨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그가 이내 신부의 저고리 옷고름으로 손을 가져갔다. 부부의 연을 맺고 하늘과 땅에 맹세한 첫날밤, 응당 치러야 할 거사이자 사내로서 가장 가슴 설레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다소곳이 눈을 내리깔고 있던 신부가 별안간 김 서방의 손을 탁 치며 밀어내더니, 치맛자락을 끌어당기며 뒤로 훌쩍 물러앉았다.
'이, 이게 무슨 일인가. 내가 무언가 사내답지 못하게 큰 실수를 한 것인가? 아니면 내 거친 손길이 불쾌했던 것인가?'
당황한 김 서방의 동공이 갈곳을 잃고 흔들렸다. 허공에 뻘쭘하게 멈춰 선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신부는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풀려던 옷고름을 한 번 더 꽉 조여 단단히 옭아매더니 꼿꼿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김 서방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희미한 촛불에 비친 신부의 눈동자는 새색시의 수줍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마치 장수를 앞둔 장군처럼 서릿발같이 차갑고도 결연한 빛을 띠고 있었다.
"서방님. 서방님께서 저를 아껴주신다는 그 마음은 참으로 감사하고 가상하옵니다. 저 역시 서방님을 평생의 지아비로 모시고 섬길 마음으로 이 누추한 문턱을 넘었습니다. 허나, 저는 오늘 밤 서방님과 합방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부부가 연을 맺은 첫날밤에 합방을 하지 않다니! 옛 성현의 법도에도 없는 해괴한 말씀이오! 혹여 내가 찢어지게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못난 사내라서, 내 옆에 나란히 눕기가 죽기보다 싫은 게요? 차라리 내 몰골이 흉하여 정이 안 간다고 솔직히 말씀을 하시오!"
김 서방의 목소리가 억울함과 수치심에 잘게 떨려 나왔다. 가난한 자신의 처지가 뼈저리게 원망스러워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은 비참한 심정이었다.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제 얼굴을 똑똑히 보십시오. 저는 서방님과 백년해로를 약조하고 평생의 생사고락을 함께할 아내입니다. 어찌 지아비를 피하고 흉을 보겠습니까. 허나, 지금 서방님의 곁을 둘러싼 이 끔찍한 처지를 똑똑히 직시하십시오. 서방님은 선혜청 말단 서리로 일하며 쥐꼬리만 한 녹봉을 받고 계십니다. 당장 내일 아침 끓여 먹을 쌀 한 줌을 걱정해야 하고, 겨울이면 땔감이 없어 얼음장 같은 방바닥에서 추위에 떨어야 하는 궁색한 살림이 아닙니까. 이대로라면 십 년이 지나도, 이십 년이 지나도 우리는 평생 이 비 새는 초가집 단칸방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이대로 부부의 연을 맺어 자식이라도 태어난다면, 그 가엾은 핏덩이에게도 이 지독하고 구역질 나는 가난을 고스란히 대물림하실 작정이십니까? 지아비로서, 아비로서 어찌 그리 무책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신부의 날카롭고도 현실적인 지적에 김 서방은 입을 앙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구구절절 뼈를 때리는 옳은 말이라 반박할 여지조차 없었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해 왔지만, 아내의 서늘한 일침 앞에서는 자신의 무능함이 발가벗겨진 듯하여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하여, 제가 서방님께 감히 한 가지 거역할 수 없는 제안을 올리겠습니다. 딱 삼 년입니다. 앞으로 삼 년간, 우리는 부부의 연을 맺었으되 거처를 따로 쓰고 절대 살을 섞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 삼 년 동안 서방님께서는 관아에서 받는 녹봉을, 단 한 푼의 엽전도 빼놓지 않고 온전히 제게 가져다 바치셔야 합니다. 밖에서 동료들과 어울려 막걸리 한 잔, 뜨끈한 국밥 한 그릇 사 드실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오로지 제가 차려주는 밥상만 드시고, 제가 꿰매 입혀주는 해진 옷만 입으며 철저히 제 명대로만 살아주십시오. 만약 단 하루라도 이 조건을 어기거나 제 몰래 딴주머니를 차신다면, 저는 그날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봇짐을 싸서 친정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 아십시오."
"뭐, 뭣이라? 삼 년간 합방을 미루고 독수공방을 하라? 게다가 내가 피땀 흘려 번 돈을 몽땅 당신에게 바치라? 그게 대체 무슨 이치에 닿지 않는 헛소리요! 아무리 가난해도 명색이 사내대장부인데 밖에서 땡전 한 푼 없이 어찌 관아 생활을 버티란 말이오! 동료들이 나를 쪼잔한 좀팽이라 손가락질하며 사람 취급도 하지 않을 터인데, 내 체면은 어찌하란 말이오!"
"그 알량한 사내대장부의 체면 때문에 평생을 가난뱅이 서리로 썩어갈 작정이십니까? 남들의 가벼운 손가락질과 삼 년의 고비를 견디지 못하신다면, 서방님은 영원히 이 시궁창 같은 밑바닥을 전전하며 생을 마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저를 믿고 삼 년을 눈 딱 감고 죽은 듯이 버텨내신다면, 제가 서방님을 도성 제일가는 억만장자 거부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평생 돈 걱정 없이 떵떵거리며 남들의 발아래 엎드리지 않게 해드리겠다는 뜻입니다. 얄팍한 체면을 지키다 굶어 죽을 것인지, 뼈를 깎는 인내 끝에 부귀영화를 누릴 것인지, 선택은 온전히 서방님의 몫입니다."
도성 제일의 부자라니. 김 서방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쥐꼬리만 한 서리 월급을 안 먹고 안 입고 삼 년 동안 고스란히 모은다 한들, 번듯한 기와집 문간방 하나 얻기 힘든 것이 이 팍팍한 한양 도성의 물가였다. 허나,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자신을 쏘아보는 아내의 형형한 눈빛과 기백에는 묘한 확신과 무게감이 서려 있었다. 평생 이 좁디좁은 방구석에서 쥐죽은 듯 궁상을 떨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미친 척하고 아내의 당돌하고도 거대한 도박에 내 남은 인생을 걸어볼 것인가.
'그래, 어차피 바닥까지 떨어진 잃을 것도 없는 인생 아니더냐. 이 여인의 배포가 보통 사내들을 능가할 만큼 대단하니, 내 한 번 속는 셈 치고 버텨보자. 못 할 것도 없지 않은가!'
김 서방은 입술을 꽉 깨물고 굳은 결심을 한 듯 주먹을 부르르 쥐며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좋소. 내 당신 뜻대로 하리다. 오늘부터 딱 삼 년, 사내대장부의 이름을 걸고 당신이 하라는 대로 죽은 듯이 살겠소. 한 푼의 돈도 허투루 쓰지 않을 것이며 당신의 말을 하늘처럼 모시겠소. 대신 삼 년 뒤에도 내 신세가 이 모양 이 꼴로 나아지는 것이 없다면, 그때는 당신도 내 매서운 원망을 결코 피하지 못할 것이오. 내 분명히 경고했소."
신부는 그제야 서릿발 같던 표정을 풀고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명심하고 또 명심하겠습니다. 자, 그럼 굳은 약조가 성립되었으니, 서방님은 저기 찬 바람이 드는 바깥 문간방으로 건너가 주무시지요. 날이 몹시 찹니다만, 그 추위가 서방님의 정신을 더욱 맑게 일깨워 줄 것입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달콤하고 애틋해야 할 첫날밤, 따뜻한 신방을 두고 덜덜 떨리는 냉골 문간방으로 쫓겨난 김 서방. 얇디얇은 홑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밤새 추위와 억울함에 뒤척이던 그는, 이것이 앞으로 닥쳐올 지독하고도 기막힌 혹독한 3년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직 꿈에도 알지 못했다.
※ 2: 서리의 월급을 통제하다
다음 날 아침, 첫닭이 울기도 전부터 서늘한 공기가 방안을 감돌았다. 밤새 차가운 문간방에서 새우잠을 자느라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찌뿌둥한 김 서방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부스스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가마솥에서는 이미 구수한 밥 짓는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아내는 어제와 다름없는 단정하고 정갈한 차림으로 낡은 소반 위에 밥상을 차려내고 있었다. 비록 쌀알은 구경조차 하기 힘든 새카만 꽁보리밥에 멀건 시래기국, 그리고 소금에 절인 짠지 한 보시기가 전부인 눈물겹게 초라한 밥상이었지만, 아내의 야무진 손맛이 들어간 덕인지 제법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밤새 고단하셨지요. 아랫목이 차가웠을 터인데 감기라도 들지 않으셨는지요. 어서 식사하시고 관아로 나갈 출근 채비를 하십시오."
김 서방은 배고픔에 허겁지겁 보리밥을 비우고 서둘러 낡은 관복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다 해진 신발을 신고 대문을 나서려는 찰나, 마루에 서 있던 아내가 서늘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서방님, 어제 첫날밤에 저와 굳게 약조하신 것을 벌써 잊지 않으셨지요? 제가 듣자 하니 오늘이 선혜청에서 한 달 치 녹봉을 타는 날이라 들었습니다. 퇴근하시는 길에 동료들의 꾐에 빠져 주막으로 새지 마시고, 단 한 푼의 엽전도 축내지 말고 고스란히 제게 가져오셔야 합니다. 명심하십시오."
"알겠소. 사내대장부가 어제 한 맹세를 하루아침에 어기겠소. 걱정 말고 집이나 잘 지키고 있으시오."
그날 저녁,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김 서방은 선혜청에서 받은 월급 자루를 아내 앞 방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쌀 몇 말과 엽전 몇 닢이 짤랑거리는 전부인, 성인 사내 하나 입에 풀칠하기도 벅찬 빈약하기 짝이 없는 월급이었다. 아내는 그 보잘것없는 자루를 찬찬히 훑어보더니, 방구석에서 낡은 장부와 붓을 꺼내어 엽전의 개수와 쌀의 무게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꼼꼼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서방님, 앞으로 아침과 저녁은 제가 집에서 거르지 않고 챙겨 드릴 것이니 끼니 걱정은 마시고, 점심은 매일 아침 제가 챙겨드리는 이 차가운 보리 주먹밥으로 관아에서 몰래 해결하십시오. 동료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장국밥집에 가는 일은 오늘부터 삼 년간 절대 없어야 합니다. 또한, 옷은 지금 입고 계신 낡은 관복 두 벌을 제가 매일 밤 번갈아 가며 기워 드릴 테니 그것만 입으시고, 새로운 옷이나 새 신발을 살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헤진 신발은 볏짚을 덧대어 제가 묶어 드릴 것입니다."
'아니, 밥도 밖에서 마음대로 못 먹고 동료들과 막걸리 한잔 나누지 못한다면, 관아에서 내 체면과 평판이 어찌 된단 말인가! 사내 놈이 돈 한 푼 없이 출퇴근을 하라니, 감옥살이가 따로 없구나.'
김 서방은 속에서 뜨거운 울화가 치밀어 올라 당장이라도 소반을 엎어버리고 싶었지만, 첫날밤 서릿발 같던 아내의 눈빛과 도성 제일의 거부로 만들어 주겠다던 그 굳은 약조가 떠올라 억지로 화를 짓누르며 꾹 참아 넘겼다. 그날부터 김 서방의 뼈를 깎는 혹독한 삼 년의 수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동이 트면, 아내는 김 서방의 손에 차갑게 식어 딱딱해진 보리 주먹밥 두 덩어리를 무심히 쥐여 주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다른 서리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활기차게 주막으로 달려가 뜨끈한 소머리 국밥에 시원한 막걸리를 걸치며 웃고 떠들었지만, 김 서방은 관아 뒤뜰 인적 없는 으슥한 담벼락 밑에 쭈구리고 앉아 목이 턱턱 메는 주먹밥을 눈물과 함께 우물우물 씹어 삼켜야 했다.
퇴근길은 그야말로 지옥 같은 고역의 연속이었다. 운종가 시장 거리를 지날 때면 고소하게 고기 굽는 냄새와 달큰하고 알싸한 술 냄새가 코를 강하게 찔렀다. 주머니에 엽전 한 닢 없는 알거지 신세니, 그저 헛기침을 하며 침만 꼴깍꼴깍 삼키며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가끔 눈치 없는 동료들이 "어이, 김 서방! 장가도 갔는데 오늘 자네가 한잔 시원하게 쏴야지! 짠돌이처럼 굴지 말고 어서 가세!" 하며 소매를 질강질강 끌어당길 때면, "아, 내, 내 아내의 병환이 깊어 약을 다려야 하니 일찍 들어가 봐야 하네!"라며 궁색하고 비참한 변명을 늘어놓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피해야 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밖에서 비참하게 말라가는 김 서방과 달리, 집안에 홀로 남은 아내는 김 서방이 상상조차 하지 못할 무서운 일들을 은밀하게 벌이고 있었다. 그녀는 김 서방이 매달 꼬박꼬박 가져다 바친 쥐꼬리만 한 월급에서 극단적으로 식비를 줄여 엽전 몇 닢을 악착같이 남겼다. 그리고 그 적은 돈을 밑천 삼아, 낮에는 이웃 양반댁의 온갖 허드렛일과 남몰래 삯바느질을 도맡아 하고, 밤에는 호롱불 밑에서 피가 나도록 짚신을 엮어 새벽시장에 내다 팔았다.
아내의 손끝은 매섭게 야무졌고, 셈을 하는 계산은 장안의 내로라하는 객주들을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로 철저하고 정확했다. 그녀는 매일 새벽시장에 짚신을 팔러 나가 상인들의 쑥덕거리는 동향을 살피며, 도성 내에 어떤 물건이 언제 귀해지고 언제 흔해지는지를 귀신같이 파악해 냈다.
'지금은 바닷가에 소금값이 헐값으로 바닥을 기고 있지만, 올여름 낌새를 보아하니 유례없는 긴 장마가 시작될 것이다. 장마가 길어지면 소금을 구워내지 못할 터이니 값은 열 배 이상 폭등할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바느질과 짚신으로 밤낮없이 번 푼돈을 모조리 끌어모아 시전 상인들에게서 헐값에 소금을 대량으로 사들이는 데 투자했다. 비좁고 비가 새는 초가집 뒷마당 헛간에는 아내가 몰래 사들인 거대한 소금 가마니가 밤마다 차곡차곡 천장까지 쌓이기 시작했다. 남편에게는 지독한 자린고비 노릇을 강요하며 피를 말리게 하면서, 정작 자신은 거대한 상단의 대객주처럼 치밀하고 대담하게 부의 씨앗을 무섭게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 서방은 매일 밤 뼈가 시린 문간방에서 코를 골며 곯아떨어지느라, 아내가 헛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소금 가마니를 나르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오직 밥 한 그릇의 설움을 삼키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 3: 흔들리는 남편과 굳건한 아내
그렇게 피를 말리는 지독한 일 년의 세월이 훌쩍 흘러갔다. 일 년 동안 철저히 아내의 통제 아래 살아온 김 서방의 몰골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비참했다. 허구한 날 차가운 꽁보리 주먹밥에 맹물만 들이마셔 댄 탓에 얼굴은 누렇게 떠서 광대뼈가 툭 튀어나왔고, 몇 번을 기워 입어 색이 바랜 관복은 엉덩이 부분이 반들반들해지다 못해 금방이라도 실밥이 터질 지경이었다. 신발은 볏짚으로 기워 신어 걸을 때마다 흙먼지가 풀풀 날렸다.
관아 내에서는 이미 김 서방을 두고 온갖 조롱과 모욕적인 뒷말이 무성하게 퍼져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우물가에 모여든 서리들은 김 서방을 흘긋거리며 대놓고 수군거렸다.
"쯧쯧, 저기 저 김 서방 꼬라지 좀 보게나. 늦장가를 가더니 영 사람이 버렸어. 마누라가 대체 얼마나 표독스럽고 독종이길래 사내를 저 지경으로 뼈만 남게 굶기고 돈 한 푼 안 쥐여준단 말인가. 사내새끼가 마누라 치맛바람에 옴짝달싹 못 하니 저게 사람 사는 꼴인가."
"내 시장통에서 넌지시 듣자 하니, 그 집 마누라가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둔갑을 한 구두쇠라더군. 게다가 신방도 따로 쓰고 김 서방을 벌벌 떠는 문간방에 내쫓았다지 뭔가. 사내 구실도 못 하고 돈만 갖다 바치는 기계 노릇을 하다니, 저러다 김 서방 제풀에 꺾여 피를 토하고 죽지 싶어."
동료들의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비수처럼 귓가를 때릴 때마다 김 서방은 쥐구멍에라도 기어들어가 평생 숨어버리고 싶었다. 사내대장부의 알량한 체면은 이미 시궁창 땅바닥에 짓밟힌 지 오래였고, 매일 밤 텅 빈 냉골 문간방에 누워 얼룩진 천장을 바라볼 때면 자신이 무슨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미친 짓을 계속하고 있는지 깊은 후회와 분노가 밀려왔다.
'도성 제일의 억만장자 부자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개뿔 같은 소리인가. 마누라의 미친 치맛바람과 망상에 놀아나다 도성에 소문난 거지로 굶어 죽기 딱 십상이다. 내일 당장 쓰러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이 아닌가. 참다 참다 이제는 내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다. 당장 오늘 밤에 집에 쳐들어가서 밥상을 둘러엎고, 내 피 같은 돈을 다 토해내라 패악을 부린 뒤에 봇짐을 싸서 내쫓든지 이혼장을 쓰든지 해야겠다!'
그날 저녁, 잔뜩 독이 오를 대로 오른 김 서방은 주먹을 불끈 쥐고 거친 발걸음으로 집 대문을 걷어차듯 부수며 들어갔다.
"부인! 안에 있소? 당장 나와 보시오! 내 사내로서 더는 이 비참한 꼴로는 단 하루도 못 살겠소!"
우당탕 소리를 내며 안방 문을 왈칵 열어젖히자, 희미하고 위태로운 호롱불 아래서 낡은 윗도리를 한 땀 한 땀 기우고 있던 아내가 차분히 고개를 들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남편의 기세 앞에서도 아내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두 손가락은 밤낮없는 바느질에 찔리고 또 찔려 붉은 핏자국이 시커멓게 엉겨 붙어 있었고, 얼굴은 김 서방 못지않게 수척해져 반쪽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서방님. 평소와 달리 몹시 취하신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 역정을 내시고 문을 부술 듯이 들어오시는지요."
"무슨 일? 당신 귀가 뚫려 있으면 내일 당장 시장통에 나가서 사람들이 날 보고 무어라 수군거리는지 똑똑히 들어보시오! 내 꼴이 거지도 이런 상거지가 없어서, 관아 놈들이 날 구두쇠 마누라한테 꽉 잡혀 사는 머저리 팔불출이라며 손가락질하고 벌레 보듯 무시를 하오! 꼬박꼬박 내 피를 말려가며 갖다 바치는 내 월급은 대체 다 어디로 빼돌리고 날 이따위로 굶기며 망신을 주는 게요! 도성 제일의 부자? 지나가는 개가 뼈다귀를 씹다 웃을 소리 작작 하시오! 난 오늘부로 이 미친 짓거리 그만둘 테니, 당장 내 돈 내놓고 짐 싸서 당신 친정으로 영영 가버리시오!"
김 서방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아내는 흔들림 없이 바느질하던 옷을 조용히 내려놓고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반듯하게 정좌를 했다.
"서방님. 겨우 남들의 가벼운 세치혀에 그리 쉽게 이성을 잃고 흔들리실 겁니까. 사내대장부가 첫날밤 하늘을 두고 한 번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썰어야지, 고작 일 년의 얄팍한 굶주림과 타인의 비웃음을 견디지 못해 그 거대한 큰 뜻을 꺾으려 하십니까? 고작 이 정도의 인내심으로 어찌 천하의 재물을 다스릴 수 있단 말입니까."
"큰 뜻? 내 눈엔 그저 당신의 지독하고 병적인 인색함밖에 안 보이오! 사람을 말려 죽이는 것이 큰 뜻이란 말이오!"
"서방님."
아내의 목소리가 한층 차갑고 서릿발처럼 엄해졌다. 방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제가 첫날밤 분명히 서방님의 두 눈을 보고 말씀드렸습니다. 삼 년을 이 악물고 버티면 반드시 억만장자 부자로 만들어 드리겠다고. 이제 겨우 일 년이 지났을 뿐입니다. 남은 이 년을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평범한 찌질이로 돌아가시겠다면, 당장이라도 원하시는 대로 갈라서겠습니다. 허나, 평생을 남들의 비웃음을 사는 비루한 가난한 서리로 밑바닥을 길 것인지, 아니면 이 년 뒤 그 비웃던 자들을 모두 당신의 발아래 무릎 꿇리고 호령하는 거부가 될 것인지 다시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단 한 번도 서방님을 속인 적이 없으며, 제 손가락의 핏자국이 그 증거입니다."
단호하고 기백 넘치는 아내의 눈빛에 씩씩대던 김 서방은 기가 한풀 꺾이고 말았다. 가만히 숨을 고르고 보니, 아내가 입고 있는 저고리 역시 자신의 관복보다 더 해진 누더기였고, 호롱불 아래 비친 그녀의 거칠어지고 피 맺힌 손끝은 그간 남편 몰래 집안을 일으키려 애쓴 지독한 고생을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었다.
'아아... 나 혼자만 고생하는 줄 알았건만, 이 가녀린 여인도 불평 한마디 없이 이리 피를 흘리며 버티고 있었구나. 그래, 내가 사내로서 첫날밤에 맹세까지 해놓고 어찌 한입으로 두말을 하며 옹졸하게 굴겠는가.'
결국 분노가 부끄러움으로 바뀐 김 서방은 깊은 한숨을 땅이 꺼지라 내쉬며 푹 고개를 떨구었다.
"내... 내가 관아 놈들의 비아냥에 잠시 이성을 잃고 옹졸하게 굴었소. 미안하오. 약조한 삼 년은 내 무슨 일이 있어도 목숨 걸고 꼭 채울 테니, 부디 내 망언에 마음 상치 마시오. 내 다시는 불평하지 않으리다."
아내는 그제야 차가웠던 표정을 부드럽게 풀고, 방구석에 던져진 다 해진 김 서방의 관복을 주워 들어 다시 정성스레 바늘귀를 꿰어 깁기 시작했다. 남편의 굳은 의지를 다시 한번 꺾고 다잡아낸 그녀의 비상한 머릿속에는, 이미 다음 단계의 도성을 뒤흔들 거대한 상업 계획이 폭풍우처럼 빠르게 그려지고 있었다.
※ 4: 아내의 비밀스러운 상단 거래
어느덧 모진 풍파를 견뎌낸 이 년이라는 긴 세월이 또 흘렀다. 그동안 김 서방은 마치 속세를 떠나 산속에서 도를 닦는 득도한 수행자처럼 변해버렸다. 동료들의 짓궂은 조롱과 지독한 가난의 고통에 완벽하게 초연해져, 누가 곁에서 무어라 떠들든 그저 묵묵히 차가운 주먹밥을 삼키며 관아의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기계처럼 처리했고, 밤이 되면 달을 벗 삼아 텅 빈 문간방으로 조용히 퇴근하는 단조로운 일상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고요하고 죽은 듯해 보이는 김 서방의 일상과 달리, 집안의 낡은 안방을 지키고 있는 아내의 은밀한 움직임은 이미 도성 전체 상계를 보이지 않는 손으로 쥐락펴락할 만큼 대담하고 무섭게 성장해 있었다. 일 년 차에 헐값으로 사두었던 헛간의 소금 무더기는 그녀의 예리한 예측대로 긴 장마 끝에 소금 품귀 현상이 벌어지며 가격이 무려 열 배 이상 폭등했고, 아내는 상인들이 가장 목말라할 때 이를 단숨에 되팔아 막대한 양의 은자를 손에 거머쥐었다.
그 묵직한 은자로 아내는 결코 만족하며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객주와 저잣거리에서 눈치 빠르게 심부름하는 고아 아이들을 넉넉한 푼돈으로 철저히 매수해, 전국 팔도 각지의 물가 변동과 거대 상단들의 은밀한 움직임을 매일 밤 낱낱이 보고받았다. 평안도 일대에 가뭄이 길어져 흉년이 들 조짐이 보이면 남들보다 한발 앞서 그쪽으로 향하는 곡식을 싹쓸이하여 매점해 두었고, 청나라 사신단이 들어올 시기가 가까워지면 시중의 질 좋은 인삼과 최고급 명주를 모조리 사들여 창고 깊숙이 비축해 두었다가 값이 천정부지로 뛸 때 조금씩 풀어 이문을 극대화했다.
비가 줄줄 새던 남루한 초가집 헛간 밑에는 남편 김 서방은 꿈에도 상상조차 못 하는 깊고 거대한 지하 창고가 은밀하게 파여 있었고, 그 안에는 아내가 불려 들인 금괴와 은표가 산더미처럼 쌓여가고 있었다. 아내는 이미 도성 내로라하는 객주들 사이에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전설적인 '얼굴 없는 거상'으로 불리며, 막강한 자금력으로 상권의 흐름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정보원 노릇을 하던 똘똘한 꼬마 아이가 헐레벌떡 아내를 찾아와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엄청난 궁궐의 기밀 정보를 쏟아냈다.
'한 달 뒤 왕실에서 선왕을 기리는 아주 거대한 제례가 열리는데, 제사상에 쓰일 최고급 밀랍 촉대와 수백 개의 구리 제기가 턱없이 부족하여 선혜청에서 이를 급히 수매하려 혈안이 되어 있다고?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청나라에서 수입되는 구리와 밀랍의 바닷길이 풍랑으로 완전히 막혀버려, 조만간 도성의 물건값이 천정부지로 뛸 것이라...'
아내의 심장이 요동쳤다.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지난 삼 년간 피를 말리며 기다려온 일생일대의 완벽한 승부처였다. 만약 이 정보를 바탕으로 도성 내에 유통되는 모든 밀랍과 구리를 사전에 철저히 매점매석해버린다면, 단순히 부를 긁어모으는 것을 넘어 나라의 콧대 높은 관리들조차 가난한 서리였던 남편의 발아래 고개를 숙이게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날 밤, 녹초가 되어 퇴근하고 돌아온 김 서방은 평소와 완전히 다른 집안 분위기에 어리둥절하여 문가에 우뚝 멈춰 섰다. 늘 짠지에 꽁보리밥이 놓여있던 낡은 소반 위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하얀 쌀밥과 큼직한 고기가 담긴 고깃국, 그리고 향긋하고 따뜻한 최고급 청주 한 병이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던 것이다.
"부, 부인! 이게 대체 무슨 잔칫상 진수성찬이오? 우리가 무슨 땡전 한 푼의 돈이 있다고 감히 이런 귀한 음식을... 혹여 빚을 지거나 남의 것을 훔쳐 온 것이오?"
놀란 토끼 눈을 한 김 서방에게, 아내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방구석에서 커다랗고 묵직한 오동나무 궤짝 하나를 스르륵 밀어주었다.
"놀라지 마시고 천천히 뚜껑을 열어보십시오."
김 서방은 영문도 모른 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궤짝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그리고 뚜껑을 여는 순간, 그는 심장이 덜컥 멎고 호흡이 멈추는 줄 알았다. 궤짝 안에는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찬란하게 번쩍이는 황금 두꺼비와, 평생을 만져보지도 못할 수백 장의 고액 은표가 가득 차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가 평생 서리 노릇을 하며 뼈 빠지게 일해도 십 분의 일조차 만져보지 못할,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거액의 재물이었다.
"이, 이게... 이게 다 뭡니까! 당신, 설마 남의 집 곳간을 털거나 관아의 국고에 손을 대는 몹쓸 짓을 한 게요? 어찌 이런 거액이 우리 집에 있단 말이오!"
"서방님께서 지난 이 년간 주먹밥을 씹으며 피땀 흘려 모아주신 그 숭고한 녹봉을 밑천 삼아, 제가 밤낮없이 장사를 하여 불려 놓은 정당한 재물입니다.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이는 지금 우리 헛간 지하 창고에 있는 전체 재산의 십 분의 일도 채 되지 않는 푼돈에 불과합니다."
"시, 십 분의 일이라니?! 내, 내가 헛것을 듣는 것이오?"
충격에 턱이 빠질 듯 입을 다물지 못하는 김 서방을 향해, 아내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강렬하고 서늘한 승부사의 눈빛으로 단호하게 명령했다.
"서방님, 내일 당장 동이 트면 관아에 위중한 병가를 내십시오. 그리고 여기 있는 이 막대한 돈을 모조리 짊어지고 가장 큰 객주들로 달려가서, 도성 내에 유통되고 있는 밀랍과 구리 그릇이란 그릇은 단 하나도 남김없이 죄다 사들이십시오. 저들이 욕심을 부려 값을 두 배, 아니 세 배를 달라고 억지를 부려도 절대 깎지 말고 부르는 대로 다 쥐여주며 모조리 사들여 우리 비밀 창고에 은밀히 쌓아두어야 합니다. 단 하루라도 지체하거나 소문이 새어나가서는 절대 안 됩니다. 서방님, 지난 긴 세월 웅크렸던 비루한 날개를 활짝 펴고, 마침내 진짜 도성 제일의 부자로 세상을 호령할 완벽한 시간이 왔습니다. 당장 움직이십시오!"
아내의 자신감 넘치고 단호한 목소리가 좁고 초라한 초가집 방안을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김 서방은 눈앞의 눈부신 황금빛과 세상을 꿰뚫어 보는 아내의 형형한 눈빛에 완전히 홀린 듯,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약조한 삼 년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할, 도성을 발칵 뒤집어놓을 거대한 상업의 판이 맹렬하게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 5: 억만장자가 된 서리
다음 날 동이 트기가 무섭게, 김 서방은 관아에 몹시 위중한 병에 걸렸다는 핑계로 병가 전갈을 급히 보내고는, 아내가 내어준 두툼한 전대가 든 무거운 봇짐을 짊어지고 운종가(종로) 한복판 시장으로 나섰다. 평소 같았으면 주머니에 엽전 한 닢, 땡전 한 푼 없어 거들먹거리는 상인들의 매서운 눈치만 보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잰걸음으로 도망치듯 지나쳤을 거리였지만, 오늘은 발걸음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그의 품 안에는 아내가 지난 이 년간 피땀 흘려 불려 놓은 거액의 은표와 금괴가 든 전대가 심장을 짓누를 듯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가슴을 활짝 펴고 당당하게 걷는 김 서방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도성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콧대가 높기로 소문난 밀랍 및 놋그릇 도매 상단이었다.
"주인장, 안에 있소! 내가 아주 큰 거래를 하러 왔으니 어서 나와 보시오. 이 도성 안에 있는 최고급 밀랍이란 밀랍은 다 가져오고, 제사에 쓸 구리 그릇도 창고에 처박힌 것까지 모조리 내어주시오. 값은 당신이 부르는 대로 섭섭지 않게 다 쳐 드리리다!"
김 서방의 호기로운 외침에 상단 주인이 귀찮은 듯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나 허름하고 낡아빠진 관복을 걸치고, 신발엔 볏짚을 덧대어 신은 김 서방의 거지 같은 몰골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상단 주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다.
"허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군. 선혜청 말단 서리 나리가 아침부터 드실 밥이 없어 빈속에 막걸리라도 과하게 들이켜셨나 봅니다. 도성에 있는 밀랍과 구리 그릇을 다 합치면 그 값이 얼만 줄이나 아시고 감히 싹쓸이 운운하며 큰소리십니까? 당신 같은 가난뱅이가 평생 안 먹고 안 쓰고 천 년을 모아도 못 살 물량이니, 공연히 장사 방해하지 마시고 당장 관아로 돌아가 낮잠이나 푹 주무시지요. 훠이, 훠이!"
명백한 조롱과 멸시가 섞인 주인의 말에도 김 서방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 화를 내거나 쥐구멍으로 도망쳤겠지만, 지난 이 년간 아내의 혹독한 통제 아래 남들의 비웃음에 완전히 초연해진 그였다. 김 서방은 말없이 품속에서 번쩍이는 고액 은표 뭉치와 묵직한 황금 덩어리를 꺼내어 먼지가 쌓인 상단 탁자 위에 툭 하고 무심하게 던졌다. 찬란한 금빛과 엄청난 액수의 은표가 아침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내 꼴이 남루하여 믿지 못하는 모양인데, 이만하면 도성 안의 밀랍과 구리 그릇을 싹쓸이하고도 남아돌 터. 당장 튼튼한 수레 수십 대를 대령하고 창고의 물건을 내 집으로 옮기시오. 단 하루라도 지체하거나 딴소리를 하면 이 거대한 거래는 없던 일로 하고 다른 객주로 갈 것이오!"
눈앞에 수북이 쌓인 거액의 은표와 금괴를 본 주인의 입이 떡 벌어지다 못해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장사꾼의 예리한 본능으로 이것이 자신의 상단 역사상 일생일대의 가장 큰 거래임을 직감한 주인은, 방금 전까지 무시하던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며 그 자리에서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아이고, 대감마님! 아니, 천하의 거상 어르신! 소인의 눈이 삐어 귀하신 어르신을 몰라뵙고 감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당장, 당장 오늘 안으로 도성 안의 모든 밀랍과 구리를 싹 다 긁어모아 대감마님의 자택 창고로 신주단지 모시듯 대령하겠나이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그날부터 사흘 밤낮으로 수십 대의 커다란 수레가 김 서방의 낡고 좁은 초가집 뒷마당으로 끊임없이 줄을 지어 밀려들었다. 도성 안의 웬만한 상단과 객주에 보관되어 있던 밀랍과 구리 그릇이 마치 신기루처럼 마술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저잣거리의 사람들은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미치광이 갑부가 쓸데없이 밀랍과 놋그릇을 미친 듯이 사재기하느냐며 수군거렸지만, 김 서방의 아내는 헛간 아래 파놓은 거대한 비밀 창고에 물건을 빈틈없이 꽉꽉 채워 넣고는 무쇠 자물쇠를 굳게 채웠다.
그리고 불과 보름 뒤, 아내의 소름 끼치도록 예리한 예측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왕실에서 선왕의 은덕을 기리는 대규모 제례를 당장 다음 달에 올리라는 어명이 벼락같이 떨어진 것이다. 제사상에 올릴 거대한 밀랍 촉대 수백 개와 새 구리 제기가 급히 필요해졌지만, 설상가상으로 평소 청나라에서 이 물건들이 들어오던 물길과 뱃길이 거센 풍랑으로 완전히 꽉 막혀버린 상태였다. 조선 팔도를 다 뒤져도 당장 왕실의 수요를 감당할 물건이 없었다.
왕실의 모든 물품을 조달하고 관리하는 관청인 선혜청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혀 쑥대밭이 되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냐! 이 넓은 한양 도성 안에 밀랍 한 근, 구리 그릇 한 점이 쥐새끼 한 마리 없이 싹 사라져 남아있지 않다니! 제례가 당장 코앞인데 이 귀한 물건들을 제때 구하여 대령하지 못하면 우리 선혜청 관원들은 당상관부터 말단 서리까지 모두 모가지가 달아나 삼족을 멸하게 될 것이다! 샅샅이 뒤져서라도 당장 찾아내거라!"
선혜청 당상관의 불호령에 서리들은 하얗게 질려 땀을 뻘뻘 흘리며 시장통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관아의 돈을 풀어 평소 물건값의 세 배, 네 배, 아니 다섯 배를 쳐주겠다고 곳곳에 방을 붙여도 상인들은 물건이 없다며 고개만 가로저을 뿐, 밀랍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평소 김 서방을 찌질한 구두쇠라 멸시하며 주막에서 고기를 씹으며 낄낄대던 동료 서리들도 사색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당장 제수용품을 구하지 못하면 곤장을 맞고 귀양을 가거나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바로 그때, 며칠째 병가를 내고 칩거하며 자리를 비웠던 김 서방이 나타났다. 평소 입던 다 해진 누더기 관복이 아니라, 최고급 비단으로 말끔하게 지어 다려진 눈부신 새 옷을 차려입고 여유롭고 당당한 걸음으로 관아 마당에 들어선 것이다. 그의 뒤에는 수십 명의 건장한 일꾼들이 물건을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대기하고 있었다.
"대감마님, 소인 김 서방이옵니다. 소인이 병석에 누워 듣자 하니, 관아에서 제례에 쓸 막대한 양의 밀랍과 구리를 구하지 못해 큰 애를 먹고 계신다 하기에... 소인이 평소 알고 지내던 청나라의 거대 상단과 은밀한 수완을 발휘하여, 나라의 환란을 막고자 그 귀한 물건들을 제법 넉넉히 확보해 두었습니다."
"뭐, 뭣이라?! 네놈이 참말이냐! 네가 정녕 그 귀하고 씨가 마른 물건들을 다 가지고 있단 말이냐! 당장, 당장 마당으로 내어오라! 네가 나라를 구하고 내 목숨을 살렸다! 값은 국고를 열어서라도 네가 부르는 대로 다 쳐주마. 아니, 원래 시세의 열 배, 스무 배를 주어도 결코 아깝지 않다! 어서 물건을 풀라!"
당상관은 김 서방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기세로 눈물을 흘리며 환호했다. 김 서방의 입과 수레에서 나온 물량은 선혜청 전체가 필요로 하는 막대한 양을 아득히 뛰어넘고도 남았다. 그는 불과 보름 전 도성을 돌며 헐값에 매입했던 가격의 무려 스무 배에 달하는 엄청난 폭리의 이문을 남기고 왕실 관아에 물건을 전부 넘겼다. 거래가 성사되자마자 수십 대의 수레에 가득 실린 금괴와 은표가 김 서방의 집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 며칠 사이 단 한 번의 거래로 벌어들인 재물은, 조선에서 떵떵거리는 웬만한 영의정이나 정승 판서 가문의 일생 재산보다도 훨씬 많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맙소사... 하늘이시여, 이게 정녕 꿈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토록 가난하고 비루했던 내 시궁창 같은 인생이, 고작 사흘 만에 세상을 호령하는 억만장자로 뒤바뀌다니!'
김 서방은 자신의 마당에 태산처럼 높이 쌓인 찬란한 금은보화를 보며 다리가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 자신을 멸시하고 조롱하던 콧대 높은 동료 서리들은 이제 김 서방의 발밑에 납작 엎드려 바윗가랑이를 붙잡고 "김 대감 어르신, 제발 이 못난 놈들을 살려주십시오!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라며 처절하게 굽신거리고 있었다. 이 모든 믿기지 않는 기적은, 춥고 배고팠던 지난 이 년의 고통스러운 세월을 묵묵히 인내하게 만들었던, 그리고 누구보다 치밀하고 무섭게 세상의 흐름을 읽어낸 아내의 경이로운 지혜와 독한 결단력 덕분이었다.
※ 6: 마침내 열린 합방의 문
세상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매점매석의 성공 이후로도 아내는 결코 자만하거나 씀씀이를 헤프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막대한 폭리로 남긴 엄청난 은자를 굴려, 도성에서 가장 볕이 잘 들고 풍수지리가 기가 막히게 좋다는 명당 터에 아흔아홉 칸짜리 으리으리하고 장엄한 대저택을 단숨에 매입했다. 비가 오면 천장에서 물이 줄줄 새고 겨울이면 찬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던 초가집 단칸방에서 서럽게 시작했던 두 사람의 신혼살림은, 이제 한양 촌구석의 찌질한 떨거지 서리에서 조선 팔도의 상권을 쥐락펴락하는 최고 거상의 화려하고 거대한 안방으로 완벽하게 탈바꿈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덧 시간은 흐르고 흘러 아내가 첫날밤 차갑게 옷고름을 여미며 단호하게 약조했던 고행의 시간, '삼 년'의 마지막 날 밤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광활한 대저택의 널찍한 안방에는 최고급 향목이 화로에서 타오르며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은은하고 매혹적인 향기를 방안 가득 내뿜고 있었고, 온돌이 따뜻하게 데워진 방바닥에는 명나라에서 직수입한 최고급 붉은 비단 요와 화려한 이불이 푹신하게 깔려 있었다. 그 눈부신 비단 요 위에는, 낮 동안 수십 명의 하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성스레 씻기고 단장해 준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고운 연꽃 같은 아리따운 자태로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마치 삼 년 전, 촛불 아래 낡은 초가집에서 수줍은 듯 결연하게 앉아 있던 그 첫날밤의 모습처럼 말이다. 하지만 분위기는 천양지차였다.
김 서방 역시 하인들이 준비해 준 최고급 비단옷을 단정하게 걸치고, 긴장과 설렘으로 터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으며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안방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일렁이는 촛불에 비친 아내의 고운 얼굴은, 가난에 찌들어 밤낮없이 바느질하던 지난날의 수척함과 피로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도성 최고 귀부인의 범접할 수 없는 기품과 눈부신 우아함만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부인..."
김 서방의 목소리가 짙은 감격과 회한으로 젖어 파르르 떨려왔다. 방 문턱을 넘어서며 그는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내는 빙긋 화사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사뿐히 일어나 김 서방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서방님, 어서 오십시오. 그토록 춥고 외로웠던 문간방 생활을 불평 없이 참아내시며 뼈를 깎는 인내를 보여주셨습니다. 참으로, 참으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김 서방은 성큼 다가가 아내의 두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지난 삼 년간 손끝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도 못했던, 남편을 대신해 온갖 삯바느질과 짚신 엮기를 하느라 굳은살이 박이고 피가 맺혀 거칠어졌던 그 희생의 손이었다. 비록 지금은 귀한 약재와 수입산 향유를 발라 매끄럽고 부드러워졌지만, 김 서방의 젖은 눈에는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아내가 홀로 헛간에서 흘린 피땀과 상처가 고스란히 보이는 듯하여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부인, 이 못난 사내가 내가 어찌 당신의 그 크고 하해와 같은 은혜를 다 갚으리까. 나를 도성 제일의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그 터무니없고 몽상처럼 보이던 약조를, 당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지켜내었소. 아니, 오히려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의 거대한 부를 안겨주었소. 내 평생 당신을 살아있는 부처님처럼 머리 위에 떠받들고 살아도 모자랄 것이오. 당신은 내 인생의 구원자요, 하늘이 내린 기적이오."
김 서방의 두 눈에서 마침내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아내의 손등을 적셨다. 돈 한 푼 없이 동료들에게 쪼잔한 사내라 조롱당하며 뒷골목에서 차가운 주먹밥을 삼키던 억울함, 텅 빈 냉골 방에서 홀로 한숨짓던 뼈저린 밤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내는 고운 비단 소매를 들어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남편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서방님. 서방님의 지어미인 제가 어찌 돈벌이에만 눈이 멀고 권력을 탐하여, 하늘 같은 서방님을 그토록 매몰차게 굶기고 찬 방에 내몰았겠습니까. 서방님은 본디 천성이 착하고 곧으나, 귀가 얇아 줏대가 약하고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써 허세를 부리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호령하는 큰 재물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남의 비수 같은 조롱을 묵묵히 견뎌내는 태산 같은 배포가 있어야 하고, 차가운 밥덩이를 씹으며 엽전 한 푼이 얼마나 무겁고 무서운 것인지를 뼛속 깊이 깨달아야만 합니다. 지난 끔찍했던 삼 년은 단순히 재물을 모으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서방님께서 앞으로 우리가 이룩할 이 거대한 부를 잃지 않고 다스릴 수 있는 진짜 '거상의 굳건한 그릇'이 되기 위한, 뼈를 깎는 수련의 시간이자 지아비를 향한 저의 간절한 믿음이었습니다."
그제야 겉으로 드러난 재물보다 서방님의 내면을 단련시키려 했던 아내의 한없이 깊은 속뜻을 깨달은 김 서방은, 가슴이 벅차오르고 먹먹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뜨거운 눈물만 흘리며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이제 서방님은 어떤 거센 시련과 풍파가 와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굳건하고 단단한 태산을 품게 되셨습니다. 제가 첫날밤 걸었던 약조한 삼 년이 오늘로 끝이 났고, 서방님은 훌륭하고 듬직하게 그 약조를 끝까지 지켜내셨습니다. 이제... 제 허락 없이 묶여있던 제 옷고름을, 서방님의 손으로 직접 풀어 주시지요."
아내가 붉게 달아오른 뺨을 수줍게 눈을 내리깔며 살포시 자신의 저고리 옷고름을 만지작거렸다. 삼 년 전, 서릿발같이 차갑게 남편의 손을 매정하게 밀어냈던 그 당돌하고 독했던 신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평생을 믿고 따를 듬직한 지아비를 향한 깊은 사랑과 온전한 순종을 간직한 여인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감격에 겨워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가간 김 서방이 마침내 아내의 붉은 옷고름을 조심스럽게 스르르 풀어 내렸다. 촛불이 일렁이며 두 사람의 애틋한 그림자가 비단 요 위로 하나로 포개어졌다. 비가 새고 찬 바람이 들이치던 낡은 초가집에서 눈물로 미루어졌던 그들의 진짜 첫날밤은, 삼 년이라는 모진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숭고한 거름 삼아 이 화려한 대저택의 안방에서 세상 그 어느 부부보다 뜨겁고, 눈부시게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었다.
※ 7: 도성 제일의 거부가 된 부부
날이 밝고 합방의 밤이 지나자, 김 서방 부부가 쥐고 있는 거대한 부와 저택의 규모는 온 도성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최고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저잣거리의 백성들과 객주들은 찢어지게 가난했던 서리 출신의 그가 어떻게 단 한 번의 거래로 하룻밤 새 억만장자가 되었는지 연신 수군거리며 기적이라 칭송했지만, 그 누구도 부부가 지난 삼 년간 차가운 문간방과 헛간을 오가며 피눈물로 쌓아 올린 치밀했던 인내와 뼈를 깎는 지혜는 알지 못했다.
막대한 부와 상권을 거머쥔 김 서방은 더 이상 굽신거릴 필요가 없는 관아의 말단 서리 직을 미련 없이 그 자리에서 던져버렸다. 대신 그는 자신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이자 스승인 아내와 함께 본격적으로 거대한 상단을 꾸려 조선 상계를 압도적으로 호령하기 시작했다. 모든 상인들이 그들 부부의 지혜를 우러러보며 가르침을 청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진면목은 그저 남의 돈을 끌어모아 금고를 채우는 졸부의 행태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듬해 봄, 조선 팔도 전역에 유례없이 끔찍한 대가뭄이 들었다. 논밭이 쩍쩍 갈라지고 흉년이 겹쳐 백성들이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간신히 연명하며 길거리에 굶어 죽어가는 시체가 널리는 참상이 벌어졌다. 도성의 내로라하는 뼈대 있는 부자들과 양반 대감들은 오히려 이때가 기회라며 곳간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쌀값을 평소의 수십 배로 올려 피도 눈물도 없이 폭리를 취하기 바빴다. 가난한 자들의 피를 빨아먹는 악행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춥고 배고픈 밑바닥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 서방 부부는 완전히 달랐다.
"부인, 우리가 삼 년간 냄새나는 뒷골목에서 딱딱한 보리 주먹밥으로 연명하며 뼈저리게 느꼈던 그 끔찍한 배고픔의 설움을 잊어선 안 되겠소. 거리에 널린 저 굶주린 백성들을 보니 마치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아 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하오. 재물을 어찌 써야 할지 당신의 뜻을 듣고 싶소."
"맞습니다, 서방님. 제가 서방님을 부자로 만든 것은 남들 위에 군림하여 피를 빨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재물이라는 것은 고여서 썩게 놔두면 결국 집안에 화를 부르는 독이 되고, 세상으로 흩어져 가난한 이들을 살리는 데 쓰이면 만복을 불러오는 생명수가 되는 법입니다. 당장 우리 상단이 가진 모든 쌀 곳간의 자물쇠를 부수고 활짝 여십시오."
다음 날 아침부터 김 서방의 으리으리한 대저택 앞에는 어린아이 키만 한 거대한 가마솥 수십 개가 일렬로 걸렸고, 하얀 쌀밥과 고기가 듬뿍 들어간 영양 탕국이 밤낮없이 끓어오르며 구수한 냄새를 도성 끝까지 풍겼다. 김 서방 부부는 비밀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곡식을 일말의 아낌도 없이 전부 밖으로 풀어, 도성 안팎에서 몰려드는 수만 명의 굶주린 백성들을 먹여 살렸다. 그들의 구휼 덕분에 한양 땅에서는 굶어 죽는 이의 울음소리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기적 같은 은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과거 선혜청에서 김 서방을 찌질하고 냄새나는 구두쇠라며 대놓고 비웃고 왕따 시켰던 콧대 높은 동료 서리들이, 부패한 관아의 기강 숙청과 도박 빚에 쪼들려 가족을 이끌고 야반도주를 할 처지에 놓였다는 비참한 소식이 들려왔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그들은 마지막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염치 불구하고 김 서방의 집 문전을 찾아와 맨땅에 머리를 박으며 눈물로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김 대감 어르신... 아니, 사해와 같이 넓으신 어르신! 우리가 과거에 눈이 멀고 어리석어 어르신의 깊고 숭고한 뜻을 몰라뵙고 짐승만도 못한 몹쓸 짓을 했소이다! 우리가 백번 천번 죽어 마땅한 놈들이나, 제발 무지한 우리 처자식들이 길거리에서 굶어 죽지 않게 쌀 한 가마니만 구걸하게 해주십시오! 평생 개가 되어 짖으라시면 짖겠나이다!"
딱딱한 땅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피가 나도록 통곡하는 과거의 동료들을 보며, 김 서방은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친히 다가가 그들의 거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복수심은 온데간데없고 넉넉한 거상의 품격만이 빛났다.
"허허, 다 지나간 과거의 일에 얽매여 무얼 하겠소이까. 그대들의 비아냥 덕에 내 독기가 서려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으니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오. 사람이 어려울 때 서로 돕고 품어주는 것이 사람 사는 진짜 도리 아니겠소. 울음 뚝 그치시고 어서들 안으로 드시오."
김 서방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그들의 막대한 빚을 몽땅 탕감하여 갚아주고, 자신의 상단에 넉넉한 일자리를 내어주어 그들이 비참한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따뜻하게 품어 주었다. 그의 이토록 너그럽고 태산 같은 성품과, 이 모든 판을 짠 아내의 비상한 지혜로움은 도성 백성들의 칭송을 넘어 궁궐 안 임금의 귀에까지 닿게 되었다. 가뭄에 백성을 살린 공을 높이 산 임금은 김 서방에게 정3품의 높은 당상관 벼슬을 내리고, 아내에게는 정경부인의 귀한 첩지를 직접 내려 그들 부부의 숭고한 공을 만천하에 치하했다.
달콤하고 쾌락적인 첫날밤의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훗날의 거대한 영광을 위해 지독한 가난 속으로 남편과 함께 스스로 걸어 들어갔던 지혜로운 아내. 그리고 아내의 뼈아프고 독한 충고를 믿고, 사내의 알량한 체면마저 버린 채 모진 수모와 굶주림을 우직하게 견뎌낸 남편.
두 사람은 이후 떡두꺼비 같이 총명한 아들딸을 여럿 낳아 훌륭하게 기르고, 평생토록 단 한 번의 큰소리나 원망도 내지 않으며 서로를 부처님처럼 아끼고 깊이 존경했다. 부부가 합심하여 이룩한 상단은 대대손손 멈추지 않고 번창하여,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조건 없이 구제하는 조선 역사상 가장 의롭고 복 받은 명문 가문으로 오래도록 이름을 남겼다. 지독한 인내와 서로를 향한 절대적인 신뢰가 빚어낸, 부부의 진정한 '백년해로'와 만복의 완성이었다.
유튜브 엔딩멘트
오늘의 야담,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눈앞에 놓인 첫날밤의 달콤함을 참고 삼 년의 지독한 고통을 묵묵히 견뎌낸 우직한 남편과, 지아비를 억만장자 거상으로 키워낸 아내의 서릿발 같은 지혜가 참으로 묵직한 감동과 교훈을 줍니다.
부부란 모름지기 서로를 끝까지 믿고 바른길로 이끌어줄 때, 하늘도 감동하여 가장 큰 복을 내려주시는 법이지요.
우리 시니어 시청자 여러분의 가정에도 서로를 향한 굳건한 믿음과 넉넉한 만복이 늘 가득 깃드시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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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음 시간에도 여러분의 귀를 쫑긋하게 할 더 재미있고 유익한 복 짓는 이야기로 어김없이 찾아뵙겠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오!